여름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낭만을 갈구한다. 때때로 우리는 저 태양보다 더 뜨겁게 열정을 데우려 하거나, 우거진 도시 인파 속에서 가장 특별한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산다. 조금 뻔할지 몰라도 이게 우리를 ‘청춘’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릴 수 있는 이유인 것 같다. 여름과 청춘은 닮았다. 어떠한 것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나날이라는 점이 특히 그러하다. 여름이 오면, 봄이라는 계절에 누렸던 것들과 어느 순간 멀어지게 된다. 생각해 보면 청춘도 잃는 것들이 많다. 좌절을 경험하면 의욕을 잃고, 갈등을 경험하면 누군가와 엮인 관계에 분열이 생긴다. 그 상실감들은 사실 꿈으로 채우기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단절과 고립에 익숙해질 수 없다. 휴지 쪼가리처럼 줏대 없이 바람에 휘날리는 청춘이라서 그렇다.
영화 <중경삼림>도 청춘의 상실감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무언가를 손에 꼭 쥐면 놓지 못한다. 손에서 놓아버리면 그것들이 전부 도망가버릴까 봐 두려워서 그런 게 아닐까. 인간은 세상에 영원한 게 없다는 걸 가장 잘 알면서도, 아직 이런저런 미련이 남아있나 보다. 이 영화 속에는 헤어진 연인을 기다리며 매일 같은 장소에 가는 남자가 있다. 미련 뚝뚝 떨어지는 이 남성은 유통기한이 똑같은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으며 사랑의 유통기한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연인을 잊으려는 마음으로 조깅을 하거나, 바에 가서 새로운 사랑을 찾으려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또 다른 남성은 자신을 떠나가 버린 연인의 편지를 받아보지 않는다. 당장에 이별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남자는 사랑하는 연인의 자취가 남은 집안의 물건들과 급기야(?) 대화를 시도한다. 이런 장면들에서 상실감을 겪은 그들이 그들 나름대로 극복을 위한 발버둥을 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모두 소금물에 담가놓은 것처럼 짠한 청춘들이지만,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앞서 말했듯이, 청춘은 여름이라는 계절을 닮았다는 점이다. 봄이 지나간 뒤에 찾아온 여름이지만, 봄은 또 돌아온다. 계절은 순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여름이나, 청춘이나 어떠한 것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나날이긴 하지만, 잃은 것만큼 얻는 것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결국에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 <중경삼림> 속 주인공들도 어떠한 상실감을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너덜너덜해진 휴지 쪼가리처럼 하찮아 보일지라도 청춘은, 그리고 여름은 재생할 수 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청춘의 유한성을 알기에, 다채로운 감정을 마구 분출해 내는 것도 어느 정도 필요한 것 같다. 여러 감정이 수 놓여서 그런지 <중경삼림>이라는 영화는 여름이 붓질한 것처럼 쨍하고, 맑은 색을 띠고 있다. 잠시 홍콩에 들른 기분이었다. 덕분에 낭만에 적셔진 내 청춘도 여러 색으로 물들었다. 여름의 뜨겁고 쾌청한 햇빛에 말려 구깃구깃한 청춘을 펼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