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다고 여기던 것을 허무는 훈련-
"Turn your clocks back,
daylight saving time ends tonight."
(10월 29일 자, YLE NEWS)
지난 주말엔 핀란드 북부와 경계가 맞닿아 있는 스웨덴 루레아라는 지역으로 자동차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스웨덴과 한 시간 시차가 나기 때문에, 여행 기간 동안 핀란드시를 염두하며 지냈는데 이상하게 국경을 넘어왔는데도 휴대폰 시계와 손목시계 시간이 서로 안 맞는 겁니다. '위성이 미쳤나, 휴대폰이 미쳤나'하고 있는데 핀란드의 서머타임(summer time)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미 서머타임이 적용된 후에 한국에서 핀란드로 옮겨온 저희는 당연히 그 시간에 맞춰 살고 그 시간에 움직이며 살았는데, 갑자기 집안에 있는 시계를 몽땅(몽땅이라 봤자 2개) 한 시간 전으로 되돌리고 나니 왠지 시간을 공짜로 번 기분입니다. 해가 저물도록 집안을 사방팔방 기어 다니는 저희 집 아가가 최근 잠드는 시간은 보통 밤 10시. 그런데 시계를 돌려놓고 나니 갑자기 밤 9시에 잠드는 착한 어린이가 되었습니다.
서머타임을 적용하는 나라들이야 익숙한 문화겠지만, 바뀔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던 삶의 기준을 인간이 직접 주체가 되어 필요에 따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저에겐 왜 그리도 신기하고 충격적이고 새로웠을까요.
돌려 생각해보면 시간도 이렇게 바꾸며 살 수 있는데, 뭔들 못 바꿀까 싶습니다. 무엇이 정해진 것이고 무엇이 당연한 것일까요. '이것은 이래야 한다, 저것은 저래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깨지못해 우리 개인과 사회를 좀 먹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요.
게 중에는 한국에서는 당연했던 것들이 여기서 통하지 않는 것들도 있습니다. 가까이는 양육방식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백일 남짓된 아이를 아기띠를 매고 밖으로 나갔을 때, 저는 동네 할머니들이 한 마디씩 던지는 말에 외출 의지를 박탈당할 뻔했습니다. "애를 왜 안 싸매고 나왔냐, 애기가 이렇게 어린데 벌써 데리고 나왔냐..." 온갖 잔소리가 쏟아졌습니다. 이 한국 할머니들이 핀란드에 오시면 뒷목 잡고 기절할 일들이 더 많습니다. 영하의 날씨에도, 눈길에도 유모차를 끌고 나오는 핀란드 엄마들이 대부분이니까요.
10월 말부터 3월까지 최소 5개월은 겨울이라고 볼 수 있는 이 나라에서 아이를 밖에 데려나가지 않는다면 일 년의 절반은 아이가 집에만 갇혀 지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엄마들은 차라리 아기들을 추위에 훈련시키기 위해, 추운 겨울에도 유모차를 바깥에 두고 낮잠을 재웁니다. 물론 홑겹으로 옷을 입히고 아이를 재우는 비정한 엄마는 결코 없습니다.
겨울옷 입는 방식조차도 매뉴얼화된 이 나라를 보면 추위에 대한 생각이 한국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추우니까 가급적 나가지 말자"가 아니라 "추위에 이길 수 있는 힘을 길러주자"인 거죠. 옷 입는 방식부터 자동차 관리까지 알면 알수록 새로운 핀란드의 월동준비 이야기는 다음 편에 더 자세히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핀란드에 와서 저희가 받을 수 있는 육아 복지혜택 중에 하나는 무료 영유아 정기검진입니다. 저희는 수입이 없기 때문에 껠라(KELA)라는 사회복지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지만, 네우볼라(NEUVOLA)라는 출산육아상담센터를 이용할 수는 있었습니다. 9월부터 영유아 정기검진도 받고, 의사 진료도 함께 받고 있는데 비싼 병원비를 내지 않고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서 천만다행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네우볼라에서 간호사와 아이에 관해 문진을 하다가 제가 괜스레 흥분한 일이 있었습니다.
간호사가 "아기가 하루에 우유를 몇 번 먹냐, 이유식은 몇 번 먹냐"라고 제게 물었습니다. 저는 "우유는 3번, 이유식은 2번, 간식 1번 준다"라고 대답했지요. 아기 엄마들은 아시겠지만 한국 8개월 아기 기준에 매우 잘 맞는 정상적인 중기이유식 스케줄입니다. 헌데 이 간호사가 "아니다, 이유식을 5번 줘야한다"면서 'Cold food'와 'warm food'를 번갈아가면서 5번 먹이라는 겁니다. 핀란드에서 말하는 이유식(baby food)이란 게 사실 별난 게 아닙니다. 찐 감자나 고구마를 준 후에 베리 등의 과일을 번갈아 가며 주라는 거죠.
이걸 들으면 한국 엄마들은 아마 웃을 겁니다. 한국에선 찐 감자와 과일은 간식이지, 이유식이 아니기 때문이죠. 이 얘기를 제게 두 번이나 하는데 갑자기 이유식 만드느라 생고생 하던 날들이 떠오르며 갑자기 흥분해 버렸죠. 그래서 "나는 쌀에 온갖 야채와 고기를 다~~~ 넣고 만든다"라고 말하고는 "이게 코리안스타일(Korean Style)이다"라고 쐐기를 박고 말았네요. 그 후로 간호사가 더 이상 이유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더군요.
집에 돌아와 가만히 생각해보니 꼭 정해진 이유식 매뉴얼이라는 게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결국 이유식이란 게 성인식(食)으로 가는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한국 밥을 먹일 거면 한국 재료를 적응시키고 핀란드식을 먹일 거면 핀란드 재료들을 훈련시키면 됩니다. 친정엄마에게 "엄마는 내 이유식을 어떻게 해줬냐"라고 물어봤더니 옛날 엄마들은 지금처럼 초기니 중기니 후기니 따지는 것이 없었답니다. 그냥 쌀에 소고기 갈아서 미음 쑤어주고, 그러다 잘 먹는 것 같으면 된장국에 밥 말아주고 하면서 키웠다는 거죠.
다른 핀란드 엄마들에게도 아이에게 어떤 것을 먹이냐고 물어봤더니 그냥 아보카도 긁어주고, 닭고기 삶아주고 한다고들 합니다. 사실 쌀이 안들어간다는 것 외에 한국 이유식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겁니다. 이젠 저희 아가는 9개월에 접어들어 곧 하루 3끼씩 이유식을 시작해야 하는데 3가지 종류의 3일치 이유식을 만든다는 부담을 버리고 그냥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재료를 집에 많이 구비해두고 그때 그때 엄마와 함께 먹는 유연함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역시 3끼 모두 밥만 먹진 않으니까요.
이렇듯 인생엔 바른 답(正答)이란 것은 없습니다. 내가 정한 답(定答)에 대한 확신만 있으면 되죠. 그렇기 때문에 보다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내가 정한 길이기 때문에 당위성에서 벗어나 인생의 유연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치 시계를 한 시간 전으로 돌려놓고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다시 새로운 룰에 맞춰살아가는 이 나라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