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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Jan 23. 2020

나의 사춘기 시절, 그때의 일기장을 담아놓은 영화

<레이디 버드 후기>

예고편을 트는 순간 예매까지 한큐에 가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가 그랬다. 달리는 차에서 엄마의 잔소리가 쏟아 지자 거침없이 문을 열고 뛰어내리는 크리스틴. 이 한 장면으로 주인공 설명이 가능할 만큼 조금은 충동적이고, 두려 움 없는 18살이다. 크리스틴은 미국 동부의 작은 도시 셰크라멘토에 산다. 지루하고 작고 따분한 셰크라멘토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흔한 이름 크리스틴은 왜 이렇게 촌스러운지. 새로운 이름이 필요한 그녀는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만든다. 그리고 가족, 선생님, 친구들에게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고 소개한다. 이 이름이 지금보다 멋지고 짜릿한 삶을 찾아줄 도피처가 되길 바라며.



진취적인 18살 크리스틴의 인생은 조금 많이 시끄럽다. 두 번의 연애는 상처를 남겼고, 학교에선 정학을 맞고, 엄마와는 매일이 전쟁이다. 멋있고 똑똑하다고 생각했던 내 언행이 타인의 상처가 될 때 문득 크리스틴은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우리의 사춘기 시절이 그랬듯, 반성과 뉘우침보다는 괜한 오기만 남아 스스로를 더 극한 상황으로 몰아간다.
처음으로 자신과의 대화를 단절해버리는 엄마. 집을 떠나는 준비를 하는 크리스틴과 이를 묵묵히 보는 엄마의 모습은 곧 이어질 그들의 헤어짐을 암시하고 있어 서운함이 밀려온다.

영화는 크리스틴이 뉴욕의 대학에서, 자신을 ‘레이디버드’가 아닌 크리스틴으로 소개하며 끝이 난다. 이제 그녀는 긴 사춘기를 마무리하고, 크리스틴답게 살아갈 준비를 마쳤다.



영화의 중반부, 자신이 만든 거짓된 모습이 버거워 엉엉 울어버리는 크리스틴은 딱 10대의 나와 같았다. 그래서 난 이 영화가 고맙다. 잊고 있던 나의 지난 시간들을 한 번에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크리스틴이 자신을 ‘레이디버드’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건 나조차 맘에 안 드는 나를 사랑해주는 친구들과 가족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10대의 우리의 모습은 어땠을까. 흔히 이야기하는 ‘중2병’이라는 단어로 우리의 사춘기 시절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 까. 나는 10대, 사춘기 시절을 모든 감정이 증폭되는 ‘감정 증폭기 시절’이라 칭하고 싶다. 모든 감정의 수치가 지금의 최소 2배는 되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큰 감정을 쏟아낼 일이 아닌 것들에 매 순간 진심을 다했던 시절이다. 그때의 진심은 어쩌면 순수함이 만들어낸 큰 힘이 아니었을까.


크리스틴이 새크라멘토를 벗어나 뉴욕을 꿈꾸는 것처럼, 나는 오산을 벗어나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싶었다. 마침 고등학교도 고개만 돌리면 고속도로가 보이는 곳이어서 수업 중간중간 창밖의 고속도로를 통해 내 꿈을 그려보곤 했다. 20살의 나는 “왜 하필 이름도 오산이야? 사람들이 나한테 자꾸 그렇게 생각하면 경기도 오산이에요~ 하고 장난치 잖아!”라며 투덜거렸는데, 엄마는 “그렇게 네가 기억에 남는 거야”라고 무심하게 말했다. 크리스틴의 엄마처럼 말이다. 그렇게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살고 있는 서울. 서울은 내게 여전히 반짝이는 설렘이다. 이곳에는 엄마처럼 나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봐주는 사람도 없고, 자신감 넘치게 ‘레이디버드’라고 불러줄 것을 강요할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내가 여전히 서울을 사랑하는 이유는 하나다. 내가 만들어낸 추억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스스로 처음 만들어낸 시간들. 나는 이곳에서 나만의 방법으로 ‘레이디버드가’ 되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작가를 꿈꾸며 서울살이를 하는 주인공 지호는 엄마와의 통화에서 “서울이 참 춥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대사를 처음 들었을 때, 참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19살 학교 창문 밖을보며 상상했던 서울 생활과 지금의 내 삶은 완전히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다. 나는 이제 추위를 너무 잘 느끼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서울이 좋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내가 써낸 이야기들의 결실을 맺을 따뜻한 봄이 올 것이라 믿기때문이다.


크리스틴이 갖는 뉴욕에 대한 환상처럼, 고등학교 내내 품고 있던 서울 판타지를 한 번에 줄지어 기억나게 했던 영 화. 또, 나의 모든 시작을 먼발치에서 지켜보았을 엄마가 생각났던 영화.


엄마가 보고 싶다면, 혹은 순수했던 내 모습이 그립다면 이 영화를 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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