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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o Jun 16. 2020

엄마는 늙어가고 있다

엄마는 늙어가고 있다.


몇해 전부터 엄마와 나의 키 차이가 벌어지고 있다. 

내 키의 바로미터는 엄마였다.

나는 내 키가 큰 줄 알았다.

엄마도 내 키가 큰 줄 알았다.

"넌 철이 안 들어서 키도 늦게까지 크나보다."고 말했다.


그게 아니었다.

내 키가 큰 게 아니라 엄마의 키가 줄어들고 있었다.

엄마의 바지가 손가락 두 마디 가량 길어져서 기장을 줄이지 않고는 더 이상 맵시나게 입을 수 없게 되어서야 그걸 깨닫게 되었다.

엄마는 "늙었다."고 했다.


엄마는 외모가 달라졌다.

키도 줄어들었고 눈두덩이의 지방이 빠져 푹 꺼져들었다.

손등은 살이 빠져 두 손가락으로 꼬집하면 종이장 같은 거죽만 들려 올라온다.

아직은 동안인가 싶은 얼굴에는 주름이 많지 않지만 서 있으면 무릎에 주름이 겹겹이 잡힌다.


엄마는 사람도 달라졌다.

까딱하면 눈물 콧물을 훔치는 일이 늘어났다.

옛날에 고생했던 얘기를 자주 끄집어 낸다.

여기까지 나는 별 느낌이 없지만 듣기 싫은 말도 있다.

"죽을 때가 되었나."는 소리다. 

자매품으로 "엄마가 죽으면..."도 있다.


솔직히 나는 엄마의 삶이 어느 정도 불쌍한 건지 잘 모르겠다.

엄마의 인생, 특히 과거의 인생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다.

사실 아주 신경 써서 곱씹지 않으면 엄마가 늙은지도 모르겠다.

동네 뒷산을 가면 엄마는 늘 나보다 빨라 내가 뒤통수를 보여주는 일이 없다.


나는 '엄마는 왜 늙어가는지'를 가장 이해할 수가 없다.

엄마는 늙지 않을 줄 알았다.

어느 정도는 내가 여전히 껍데기는 어른이지만 그 속에 어린이 혹은 청소년 혹은 젊은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함께 늙음'이라는 개념이 없으니 엄마도 아직은 생생한 중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나보다.


나는 엄마의 늙어감이 답답하다.

늙음이 애석한 건지 엄마의 인생이 애석한 건지 지금은 헷갈린다.

실상이 어떻든 간에 그저 전자였으면 좋겠다.

내가 엄마의 인생을 애달파 하지 않듯 엄마도 자신의 삶의 여정을 자랑스러워 했으면 한다.


"사랑한다."는 흔하디 흔한 말을 한 번도 하지 못한 나는 이런 말도 대놓고는 못하겠다.

아직은 못하겠다.

앞에서는 퉁명스럽게 맞장구치고 뒤에서는 이렇게 엄마를 관찰하고 기록해야겠다.

언젠가 이 기록들이 엄마에게 행복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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