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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o Feb 02. 2022

202201 강원도 여행

나라면 결코 잡지 않았을 일정. 연휴를 앞두고 4일씩이나 집을 떠나 유람을 하다니, 부담스러울 노릇이다. 하지만 판은 이미 벌려졌고 집안에서 매우 취약한 의사결정권을 가진 나는 딸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강원도 4박 5일 여정.


시작은 속초였다. 강원도도 속초도 몇 번인가 다녀간 적이 있지만 영랑호는 처음이었다.


영랑호의 낮과 밤


영랑호는 자연호라고 한다. 주거지에 꽤 가까이에 있는 호수는 ‘XX호수공원’처럼 인공호수만 알고 있던 사람으로서는 그것만으로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영랑호수윗길”이 개통된 지 채 몇 달이 되지 않아 아마 수윗길이 영랑호의 새로운 명물이 된 것 같다. 수면 가까이 걷는 즐거움도 있지만, 수윗길이 생긴 덕에 영랑호 산책 코스를 내키는 대로 조율할 수 있다는 것도 좋은 효과인 듯싶다. 우리는 수윗길을 건너 범바위 쪽, 짧은 산책길을 걸었다.




영랑호 주변에는 봄을 기대하게 하는 꽃나무들이 겨울 속의 깊은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 불에 탄 채 방치되어 있는 단독주택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가끔씩 전해 듣는 영동지방 큰 불의 상흔인 것 같았다. 건물들은 생긴 모양새가 같고 무너져 내린 틈새로 보이는 부엌 타일까지 같아 분양된 주택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검색해 보니 영랑호 리조트의 독채 건물들이라고 한다. 복잡한 사정 탓에 좀 더 그 자리에서 화마의 잔재로 서 있을 모양이다. 영랑호는 화랑들의 수련터였다는데, 아름다움의 상징인 화랑들이 봤다면 경을 칠 노릇이었겠다.


속초의 이틀째는 명불허전 설악산으로 포문을 열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에 올랐다가 내려온 후 비룡폭포까지 걷는 코스. 연수를 셀 때 열 손가락을 다 써도 모자랄 정도의 과거 언젠가 설악산 케이블카를 탄 기억이 있다. 케이블카에서 내렸을 때 바위 위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곰 동상의 이미지가 뇌리에 늘 박혀 있었다. 이번에 가 보니 곰 동상은 산 위가 아니라 설악산 소공원에서, 그러니까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기 전에 만날 수 있는 거였다. 아마 처음 마주한 설악산의 웅대함을 그런 식으로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권금성 가는 길에 만난 눈동물 친구들


며칠 전, 눈이 많이 내리고 여전히 쌓여 있는 설악산은 말 그래도 한 폭의 수묵화 같은 느낌이었다. 한국의 산수화는 일종의 마음 수양을 돕는 명상화처럼 그려서 그렇게 농담을 조절하는 게 아닐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던 것이 무색해졌다. 산수화는 사실주의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젠 없는 겨울 산길 산책은 반은 동계 극기훈련 같았지만, 자꾸만 바라보고 그 풍경으로 끌려 들어가게만 되는 것이, 그림에 홀려 그 안에 갇혀 버린 누군가의 괴담을 떠올리게 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설악산의 품을 자꾸만 찾는지 이제는 느낌으로도 조금은 알 것 같다.


극기훈련의 끝은 역시 배 채우기다. 속초관광시장으로 가자. 우선은 아직까지 건재한 갯배를 타고 아바이마을로 향했다. 연휴 직전, 평일, 겨울의 절묘한 어우러짐 탓인지 아바이마을 골목에는 사람 그림자가 드문드문했다. 오징어순대와 아바이순대로 배를 채우고 다시 갯배를 타고 건너와 본격적으로 시장으로 들어섰다.


이전에 왔을 때에 비해 사람이 적어서였을까. 이번에 시장을 돌아보면서 느낀 점이 있다. 속초관광시장에는 어쩐지 생활감이 적다. 애초에 이름 자체가 ‘관광시장’이기는 하다. 그래도 남대문시장에도 반찬거리를 늘어놓은 가판대를 볼 수 있고 과일, 채소를 싸게 파는 집이 있던데 속초시장은 그런 느낌이 확실히 적은 것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관광객 뜨내기의 경로와는 다른 시장의 미로길이 있는 걸까. 하지만 나에게 당장 중요한 건 닭강정이었다. 닭강정을 뚤레뚤레 들고 초입에서 파는 작고 정갈한 떡집에서 충동구매로 종류별로 떡을 사들고 시장 미로를 탈출. 속초에서의 마지막 밤은 관광시장표 음식들로 꼭꼭 채우느라 결국 영랑호 나머지 반쪽을 걸어서 산책하는 건 실패했다..


다음날, 차로 영랑호를 돌아 나오는 것을 끝으로 속초 일정은 마무리. 그 유명한 7번 국도를 따라 고성으로 향했다. 청간정에 발도장을 살짝이 찍고 난 후, 본격적인 고성 탐방은 최북단 통일전망대부터였다.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만난 털동물 친구들. 오래오래 행복하게 건강하게 지내라.

사실 통일전망대의 명칭은 ‘북한전망대’ 혹은 ‘이북전망대’라고 해야 할 거다. 아니면 ‘통일기원대’라든지. 지금까지 서너 곳의 통일전망대를 다녀 봤지만 솔직히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이 새록새록 샘솟게 만드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고성의 통일전망대는 조금 달랐다.


저어어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곳이 바로 ‘금강산’


고성 통일전망대에서는 무려 ‘금강산’을 볼 수 있다. 설악산의 풍경도 압도적인데 금강산은 그 이상이라니.. 아예 보이지 않으면 욕심도 나질 않을 텐데 볼 수록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감질나게 보고 나니 저곳은 꼭 가 보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심지어 고성 통일전망대에서는 금강산에 가는 뻥뻥 뚫린 도로도 잘 보인다.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금강산 관광은 살아생전 도전해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화진포의 숙소를 향해 남하.


마음의 눈으로.. 보지 않아도 화면 밝기를 높이고 확대하면 보이는 별하늘


밤에 먹을 부식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주변에 마땅한 상점이 없어 모두가 무알콜 청정 마인드로 잠자리에 들던 고성의 첫날밤. 제정신으로는 밤에 일어나는 사소한 일이 그다지 재미있지 않으니 뭔가 꺼리를 찾아야 한다. 숙소 근처에 높은 건물, 밝은 불빛이 없다는 점에 착안해 한동안 그 근처에 손가락도 가지 않았던 별자리 어플을 열고 밤하늘을 탐색해 봤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정면에 북두칠성, 큰곰자리 작은곰자리가 떡하니 떠올랐다. 하늘에서 북두칠성을 찾던 때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달님에게만 눈 맞추는 것은 낭만의 나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북두칠성 국자로 감수성을 퍼먹고 낭만 유랑자의 자격을 회복해 보자는 다짐과, 어쩌다 보니 머리를 서향에 두고 자는 찜찜함으로 고성의 첫 밤이 저물었다.


고성 화진포의 둘째 날은 동계 극기훈련 2탄, 응봉 오르기가 핵심 일정이었다. 화진포의 성, 일명 김일성 별장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응봉을 지나 거진항까지 트레킹을 할 수 있다. 일정상, 응봉에서 돌아오기로 하는데, 그 코스는 초입의 경사진 계단을 오른 후에는 꽤 완만한 능선길이라 등산 초심자도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다만, 이번에는 눈이 녹지 않아 생긴 미끄러운 길이 포진해 있어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구간들이 있었다. 눈이 녹은 흙길은 진흙길이 되어 미끄럽기도 해 의도치 않은 극기훈련 코스가 된 응봉 트레킹. 하지만 ‘이곳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풍경은 가벼워서 온 몸을 관통하는 상쾌한 감동을 전해 주었다.


응봉에 오르면 호수와 바다와 산을 모두 볼 수 있다



이번 여행은 내내 바다를 끼고 있었기에 ‘수산물 공략’이 주요 목적 중 하나였다. 싱싱한 수산물을 찾아 -걸어가지는 못했지만- 화진포에서 멀지 않은 거진항에서 멀지 않은 거진항수산물판매장에 가보기로 했다. 화진포에서 출발해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경로를 무시하고 길에 번듯하게 놓인 표지판을 따라가니 왕복 2차선의 해안도로가 나왔다. 그리고 그 중간에 의외의 명소 ‘백섬(백암도) 해상전망대’를 만났다.



엄청  것은 아니지만 백섬 전망대는 동해의 기백을  그대로 ‘온몸으로 느끼게 주는 곳이었다. 어쩌면 겨울이라 날아갈 듯한 바람 덕분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백섬은 앞으로도 고성에 온다면  빠뜨리지 않고 들러야 하는 곳으로 기억에 꼭꼭 아로새겼다. (응봉에서 이어지는 트레킹길  ‘거진해맞이산림욕장으로 내려오면 바로  건너가 백섬 전망대다. 그리고 그곳에서 산을 오르내리는  짧고 가파르다.)


평일 오후, 시장의 적막함이 너무 부담스러워 나는 크지 않은 규모의 거진항수산물판매장에 들어가지 않았고, 다녀온 집안사람들 말에 따르면 속초관광시장보다 여러 면에서 낫다고 한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북적인다는 말에 코로나19가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안심이 되기도 하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동해산 수산물들은 하나같이 맛있었다.



사실 이번 여행이 썩 내킨 건 아니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통보받고 딸려간 데다가 꽤 긴 기간 집 밖에 나와있어야 한다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다녀와서도 끝이 좋았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생각하고 있던 계획도 좀 어그러졌고, 여행을 다녀온 후 연휴가 시작되는 바람에 생활리듬이나 습관도 위태로워진 데 더해, 극기훈련 탓에 몇 달 전 다친 후 겨우 달래 두었던 무릎 상태는 다시 나빠졌다. 그런데도 정수리 숨골로 스며들던 강원도의 찬바람을 떠올리면 심장 박동이 조금 더 무거워지는 건 무엇 때문인지 참 모를 일이다. 어쩌면 나는 여행을 좀 좋아하고 강원도를 좀 좋아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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