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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o Feb 02. 2024

안녕, 용산, 다시는 보지 말자

디지털카메라 수리 완료, 이번이 세 번째.

서울에서 태어나 일생을 서울, 서울 언저리에서만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서울 안에서 아는 동네보다 모르는 동네가 더 많다. 영 익숙하지 않은 곳 중 하나, 용산.


용산을 가 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한 때 출근길 경로에 ‘용산역’이 있어 숱하게 발을 디뎠다. 다만, 환승경로였기에 역사 바깥에 나가 본 적이 없을 뿐. 열차 차창 밖으로 스치는 새로운 고층 건물과 낡은 단층 건물들의 이미지가 용산에 대한 내 단상의 거의 대부분이다.


하지만 제대로 용산 땅을 밟아본 적이 있긴 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세 차례 정도 가 봤고, 디지털카메라를 수리하러 한 차례. 첫 수리는 다른 지점, 두 번째는 원래 가던 A/S 지점에서 더 이상 카메라 수리를 하지 않으신다길래 용산지점을 찾아갔다.


사실, 카메라 수리를 위해 첫 번째로 갔던 지점도 ‘도시괴담 영상을 찍으면 꽤 그림이 나오겠다’ 싶던, 어둡고, 천정 낮고, 주변 상권이 쇠퇴해 영업점이 드문드문하던 상가에 있었다. 용산지점은 ‘원효전자상가’라는 아주 전문적인 이름이 붙은 상가에 있다고 했다. 기대치가 높아졌다. 용산전자상가라니, 기계를 잘 모르지만 좋아하는 터라 무언가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듯했다.


원효전자상가의 계단. 옛날 옛적 학교 계단이 생각나네.


용산전자상가의 쇠퇴. 말로만 들었지만 그것이 현실일 줄은 몰랐다. 그 거대하고 번쩍번쩍한 건물들 뒤편, 열차 차창 너머로도 미처 보지 못했던 그 뒤에 용산전자상가들은 처음 갔던 서비스센터 지점과 그 상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어디쯤에 있는 세대의 일 인으로, 그리고 물질 그 자체가 가진 힘을 믿는 유물론적 인간의 일 인으로, 그 모습에 괜히 의기소침해졌다.


그런 마음은 A/S센터의 기사분을 뵙고 많이 사그라들었다. 더 정확하게는, 수리된 카메라를 받아 들고 가라앉았다. 렌즈 어딘가에 먼지가 들어가 조리개를 어느 정도 조이면 먼지가 찍히는 증상으로 두 번째 수리. 첫 번째 수리도 그랬지만, 두 번째 수리도 말끔하게 이루어졌고 먼지가 들어갈 법한 부분도 잘 다듬어주셨다. 장인의 포스. 용산에는 여전히 장인의 자부심이 스며들어 그곳을 지탱하고 있나 싶었다. 정적인 모험이 그렇게 끝났다.


그런데! 작년에 다시 렌즈에 먼지가 들어가 잡티가 자꾸 사진 같은 곳에 등장했다! 이걸로 세 번째. 이 카메라를 들인 지 10여 년이 되었으니 그리 많은 횟수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다른 기능이나 기계 결함의 문제가 아니라 자꾸 먼지의 역습이라니. 이젠 슬슬 지겨워진다. 엄마는 “그럴 바에는 그냥 하나 사.”라고 나의 물욕에 불을 댕기다가, “다음에 카메라 산다면 사려고 했던 모델은 100만 원 넘는데, 수리비는 5만 원 정도.“라는 대답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건물과 건물, 건물 사이와 건물 사이


그래서 다시 찾은 용산. 몇 년 전에 비하면 용산역 주변의 혁신 없는 번쩍번쩍임이 용산전가상가 쪽으로 몇 발자국 더 슬금슬금 넘어오는 듯했다. 그 기묘하고 육중한 자본, 욕망의 물결이 보이는 듯해 오히려 이전보다 더 모험의 항해길에 오른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 서비스센터의 기사분들은 여전히 친절하시고 여전히 수리를 잘해 주시고. 그 낡은 건물들 안을 속속 채우고 계신 그런 전문가, 장인들께서 그 사이 크레바스를 더 깊고 넓게 만들어 주실 수 있을까, 그건 그냥 외부인의 섣부른 낭만인 걸까. 이 뒤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어쩐지 멜랑꼴리해져서 정말 오랜만에 흑백사진을 찍어봤다. 이 카메라 산 후 처음 써 본 필터. 10여 년 만에!


하지만 이미 애정 박힌 카메라를 바꾸고 싶지도 않고, 더욱이 다시 수리를 맡기고 싶지도 않다.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먼지와 4만 5천 원… 그러하니 이제 다시 보지 말자, 원효전자상가의 에메랄드빛 계단이여. (기사님들은 건강히 지내시고 나에게 해 주신 것처럼 여러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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