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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o Feb 07. 2024

물성(物性)의 노예이올시다

CDP를 샀다, 3년 만에, DVD 플레이어 겸용으로.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를 월정액으로 이용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휴대용 CDP를 사용하다가, MP3 플레이어를 사용하다가, 스마트폰의 음악 어플을 사용하다가, 그리고 난 후 드디어 스트리밍 서비스이다. MP3 플레이어와 음악 어플을 사용할 때도 온라인 음악 사이트는 그다지 접속한 일이 없다. '굳이' CD를 사서 MP3 파일로 리핑을 한 후 기기에 파일을 옮겨 들었다. '음악은 음반, 앨범으로 들어야지'라는 오랜 습관을 가장한 허세를 놓을 수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집에는 늘 음향기기가 있었다. 작은 전축, 그다음에는 큰 전축, 그리고는 홈씨어터. 어느 정도 머리 굵어진 후 틀어주는 음악이 아니라 골라 듣는 음악이 된 후 '나의 음반들'은 주로 CD였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으니 한 푼 두 푼 모아 시공 디스커버리 시리즈의 [록의 역사] 같은 책에 나온 명반을 한 장씩 사 모았다. 그렇게 취향이 만들어졌다. 심사숙고해서 고른 것들이니 소중하기란 두 말하면 잔소리. 내 손에 CD가 있는 음악은 MP3로 들어도 충만감이 차 올랐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어쩐지 음이 얇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이사를 했다. 10여 년 만에 TV를 바꿨다. 설치기사분이 한켠에 세워 둔 홈씨어터를 보고 한 마디 하셨다. "저건 오래된 모델이라 이 TV랑 연결하면 잘 안 맞아서 둘 다 고장 날 것 같은데요."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데, 요는 요즘 물건과 옛날 물건은 전압이 잘 안 맞는단다. 괜히 연결했다가 새로 산 비싼 TV에 문제 생길 수 있다고 한다. 그럼 무상 AS를 받지도 못하는 거다. 바이바이, 홈씨어터,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잘못했다. 예전보다 작은 집으로 이사해서 전부 다 풀어 둔 건 아니지만, 그래서 더 고르고 골라 꺼내 둔 CD는 어떻게 들으란 말이냐. 홈씨어터를 떠나보낼 때에는 금방 뭔가 CD플레이어를 살 것 같았는데 속절없이 시간은 잘만 갔다. 큰 전축, 홈씨어터 쓰던 가닥이 있으니, 큰 스피커를 갖고 싶고, 그런데 작아진 집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모르겠고. 그 와중에 한동안 피로에 쩌들어 음악을 들을 여력도 없었다. 어영부영하다 보니 인터넷 변경과 함께 AI 스피커라는 게 들어오고, 그 녀석에게 음악을 틀어달라고 하려다 보니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었다. 수도의 손잡이를 제일 높게 들어 올려도 물이 졸졸졸 흘러나오는 수도꼭지를 이용하는 느낌이다. 뭔가 답답하지만 끊기지는 않으니 감사하달까. 그렇게 3년을 넘어섰다.


이제 좀 살만해졌나 보다. 새로운 곡이 귀에 들어오기도 한다. 취향을 재발견하면서 얄팍해진 허세를 다시 부풀리고 싶다. 나, 국카스텐 데뷔앨범 딱지판 가진 인간이다. 나, 신씨티 감독판 DVD 가진 인간이다. 인간성도 0과 1의 디지털로 치환되는 시대에 하다못해 플라스틱 판에서라도 실존을 실감하고 싶다. CDP 사자.


큰 스피커를 썼던 인간치고 음질에 무덤덤해서(잘 몰라서) 다행이다.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20센티미터 직경의 프라이팬 정도 크기인 CDP를 세일가에 샀다. 새로 CDP를 장만하면 꼭 처음으로 다시 돌려보려 했던 "The Clash"의 "London Calling" 앨범을 틀었다. 그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의 짜릿한 충격이 되살아났다. "어디서 그런 이상한 걸 사서 듣냐." 외출에서 돌아온 엄마가 끄라고 했다. 그래도 괜찮다. 이제 스마트폰 음악 어플에도 고이 모셔놓은 그 앨범을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들어도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그리웠다, 다시 만나 반갑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CD의 음악소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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