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이치 타나아미" 특별전, "大베르세르크"전
<응당 받을 것이 있는 사람은 어서 그것을 받기를 _()_
위로와 평온함이 필요한 분들은 위로 속에서 하루빨리 평온함을 느끼실 수 있기를 _()_>
넷플릭스의 추천은 쓸모없기도, 그저 그렇기도, 유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매우 훌륭하기도 하다. "모노노케: 우중망령"은 매우 훌륭함에 속했다. 메시지도 그렇지만 순수하게 시각적인 쾌락에 잠겼다 나왔다. "모노노케"를 보면서 몇 번이나 '매우 좋음'을 눌렀다. 혹여 나의 쾌감을 넷플릭스가 간과하기라도 할까 봐.
"케이이치 타나아미(Keiichi Tanaaimi)" 특별전이 눈에 걸린 것은 "모노노케" 덕분이었다. 섬세한 선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분절, 그 괴리된 공간을 채우는 다채로운 색, 그 다채로움이 뿜고 있는 역동성이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실로 오랜만에 전시회장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문제는 내가 어지간해서는 집에서 나가질 않는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마침 조촐한 송년모임 약속이 잡히고, 이때를 놓치면 아마도 나는 이 열망을 잃고 말겠지, 하는 생각에 배수진을 쳤다. 당일 예매를 해서 환불을 못 받게 만들고 약속 시간에 한참 앞서 비장하게 길을 나섰다. '나는 지금 케이이치 타나아미 특별전을 보러 간다.'
전시장에 첫 발을 들이자마자 '이런 상태가 코티졸과 도파민이 동시다발적으로 뿜어 나오는 것인가' 싶었다. 보는 순간 버거운데 콧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세계대전 시기의 폭격, 폐질환에 의한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는 삶의 이력이 녹아 있다는 타나아미 님의 작품에는 삶과 죽음, 희열과 죄책감이 뒤엉켜 있는 것만 같았다. 그저 보기만 하는 나로서는 쾌락이 쾌감으로 넘실넘실 넘어가려는데, 작품들에서 나온 희미한 뼈다귀 손이 발목 뒤꿈치를 잡아 반 척 정도 발걸음을 늦추게 만들고 있었다. 어쩌면 작가는 파괴와 소멸의 순간에 희락을 느꼈다는 데 생의 죄의식을 끼워 넣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감히 추측해 본다. 내 그림자의 한 부분이 그 쨍한 색 조각들에 물들어 있기를, 혹은 그림자 안에 타나아미 님의 물고기 한 마리가 담겨 있기를 바라며 약속 시간에 쫓겨 후다닥 전시장을 나왔다.
아마도 어지간해서는 집에서 나가기 쉽지 않을 테니 다른 전시를 또 보러 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건만. 새해 직전 휴대전화에 알림이 떴다. '대베르세르크전 전시 관람이 1월 5일로 종료'된다던가. 몇 달 전, 인터넷에서 베르세르크 관련 전시를 한다는 내용을 보고, 전시명 앞에 '大'가 붙었길래 이건 일생에 한 번뿐일 테니 꼭 가야겠다고 생각하고서는, 예매를 해 두고 잊고 있었다. 과연 내가 바깥에 나가야 하나 싶어 살짝 환불을 고민했지만 '大'베르세르크전이라잖냐, 大. 미정이던 약속을 잡고 약속 시간에 한참 앞서 담대하게 길을 나섰다. '나는 지금 大베르세르크전을 보러 간다.'
아아, 미우라 켄타로 님은 왜 그리 일찍 세상을 떠나셨을까. 원화를 보고 나니 그동안 나는 베르세르크를 보거나 읽은 것이 아니라 훑고 넘어가기만 했다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하나의 선에 나타나는 다양한 굵기와 농도에 압도당할 지경이었다. 자연스레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전시장을 돌았다. 미술작품 같은 만화를 그리고자 했다는 작가의 말이 단순한 다짐이 아니라 단호한 결의였다는 것을 절감했다. 만화를 그리는 것 외의 일상이 없으셨다는 작가의 작품을 목도하니, 졸음, 추위, 성에 차지 않는 방석 등등 인생에서 수많은 장애물을 생성해 내고야 마는 내가 어찌나 한심하게 느껴지던지. 그리고 20-30분의 노력에 기괴한 대견함을 선사하는 내가 어찌나 개탄스럽던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연초에 "大베르세르크전"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일순간에 개과천선할 수는 없겠지만 하루에 5분씩만이라도 한심함과 개탄을 덜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미우라 님의 생전 인터뷰 영상에서 (2021년 기준) 5분의 3 내지 4 정도는 진행된 것 같다는 내용이 나왔는데, 지금까지의 진행에 비추어 보면 <베르세르크> 안에서 가츠의 여정은 아무래도 10년 정도는 남지 않았나 싶다. 그 끝에서도 지금의 이 다짐을 잊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쁘지 않은, 실은 꽤 괜찮은 연말연시였다. 올해는 좀 더 찾고 생각하고 남겨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