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좋은데...계속 좋아하고 싶은데...
이건 서스펜스다!
<월레스와 그로밋> 시리즈를 몇 편인가 본 적이 있다. 빈약한 기억력 탓에 남아있는 감상은 '그로밋 대단해! 그로밋 귀여워!' 그리고 '재미있다!' 정도지만. 조용한 때에 더 집중해서 볼 수 있다면 이 시리즈의 매력을 더 파내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날을 잡았다. 적당히 카우치 포테이토의 구색을 갖추고 <웰레스와 그로밋: 복수의 날개> 재생 시작.
<월레스와 그로밋: 복수의 날개>는 한 마디로 서스펜스였다. 아무래도 어린이들도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인 데다가, 해피엔딩을 예상할 수밖에 없으니 심장이 조여 오는 '으어어'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거 뭐야 하는 '후달달' 정도는 되겠다. 그리고 그 덜덜거림을 불러온 장본인은 역시, '노봇'이었다. 인터넷에서 가끔 '<월레스와 그로밋> 무섭다' '거기 나오는 캐릭터들이 겁나게 생겼다'는 게시물을 접했다. 기억이 가물거리기는 해도 이 시리즈에 대해 무섭다는 인상은 남아있지 않아 의아했었다. 이젠 왜 무섭다고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월레스가 새로 발명한 노봇은, 굳이 말을 붙이자면, 가정용 휴머노이드다. 사람은 노봇에게 음성으로 지시를 내릴 수 있고 노봇은 정원 가꾸기, 창고 정리, 심부름 등 인간이 필요로 하는 여러 일들을 처리한다. 노봇은 지치지도 않고 즐겁게(?) 허드렛일을 도맡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인공일반지능(AGI) 수준까지는 아닌 듯하다. 미리 학습한 범위의 작업을 매우 능숙하게 처리한다는 점에서 아주 잘 만들어진 인공특수지능(ASI)에 더 가까워 보인다. 약간의 스포일러를 덧붙이자면, 진짜배기 악당은 페더스 맥그로지만 실질적으로 악행의 대부분을 수행하는 것은 노봇이다.
노봇이 무서웠던 건, 일단, '눈이 미쳐서'다. 흔히 '맑눈광'이라고 하던가. 페더스 맥그로가 맑눈광의 대명사로도 일컬어지는 것 같지만 내 입장에서는 노봇이 맑눈광의 진수였다. 새삼스레 감탄하는 디자인의 힘. 동그라미와 약간의 광채로 그런 분위기를 낼 수 있다니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반타블랙 구체 위에 유리막 씌어 둔 것 같다. 그리고 노봇의 또 다른 무서움 포인트는, 빛을 흡수한다는 반타블랙의 속성과도 비슷할 수도 있는데, 명령을 흡수할 뿐 그 자체는 아무것도 생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걸 현실과 연결시켜 보니 꽤 실제적인 공포가 되었다.
고성능의 로봇, 그중에서도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에 대한 우려는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특히 인공일반지능의 등장은 새로운 종류의 행위자의 탄생을 의미하며, 그들은 호모 사피엔스 이후 지구의 가장 유력한 통제자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적지 않다. 그것은 곧 인간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반면, 인공특수지능은 한정된 업무 처리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일자리 경쟁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실질적인 위협자의 지위까지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감이 없지 않다. 그런데 노봇을 보니 생각이 좀 달라진다. 어떠한 딜레마도 만들 수 없고 고민하지도 않고 도움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고뇌 없이 뭐든 척척해 낼 수 있는 존재도 상당히 두렵다. 그런 존재는 설득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기술적인 부분을 떠나서, 그런 존재의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강제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수단만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건 좀 슬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일의 원흉은 월레스다!! 처음부터 그로밋을 손으로 쓰다듬어 줬다면 기술만능주의에 빠져서 일을 그르치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앞으로 인공지능 로봇의 보급 확대에서 예상되는 난점을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를 월레스와 그로밋 사이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접촉'. 이건 직접적인 물리적 접촉의 상태를 말하기도 하고 공유하는 무언가를 매개로 해 인간과 기계가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이뤄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접촉면이 넓어질수록 적어도 인간은 기술을 인간답게 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그로밋을 토닥이는 것이 인간다움을 잡아 붙들어 매 주는 것처럼.
그래서, 결론은, '월레스가 잘못했어'다. 그로밋, 고생이 많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