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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엠 저리킴 Sep 24. 2021

지독한 수학 사랑이 낳은 결과

수.낳.괴 : 수학이 낳은 괴물



나는 수학을 좋아한다. 엄밀히 말하면 계산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학문으로서의 수학數學보다는 무언가를 계산해서 답을 얻어내는 그 행위를 좋아한다고 보면 된다. 그것이 숫자이건, 행동의 양식이건, 사람과의 관계이건 상관없이 말이다. 미리 고백하자면 오늘의 글은 매우 길다는 사실을 미리 안내드리는 바이다. (마음 단단히 먹고!! 출바알~~!!)



까마득한 옛날 고등학교 1학년 시절까지는 학력고사의 시대였다. 한 반에 50명씩 되던 시절이었는데 성적이 반에서 중간보다 조금 위 정도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15등 ~ 20등 정도? 공부에 특별히 취미가 없었고, 특히 암기를 해야 하는 과목은 완전 포기 상태였다. 암기 과목은 그야말로 엉덩이로 공부하는 과목이었으니 나같이 끈기 없는 사람에게는 넘지 못할 산이었다. 오로지 모든 것을 잊고, 계산에만 집중할 수 있는 수학 만이 나의 유일한 재미였고, 시간 때우기 좋은 과목이었다.


그때는 대부분의 학생이 내신 성적과 학력고사 성적이 비슷하게 나왔다. 시험 문제의 방식이 둘 다 암기 위주의 시험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1학년 여름쯤인가에 기존 <학력고사>에서 새롭게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는 제도로 바뀐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지만 그거나 저거나 어차피 in 서울에 들어갈 실력은 안되었기 때문에 나는 변경된 제도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얼마 후 새로운 방식의 수능시험으로 전국 모의고사를 치르게 되었다. 나는 출제범위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가벼운 마음으로 시험에 임했다. 시험 문제를 받아 들자 갑자기 생각이 달라졌다. '어? 이걸 내가 어떻게 풀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열심히 문제를 풀었다. 그리고는 모의고사 시험 결과를 받아 들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첫 모의고사 성적이 반에서 5등(?)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어, 사회/자연 과학, 영어 모두 공통적으로 점수가 잘 나왔지만 수학이야 말로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가 나왔다. 그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석차가 현격히 올라갔다. 이런 신세계를 보았나.. 공부를 안 했는데도 풀 수 있는 문제가 있다니.. 하필 내가 그 수능시험을 치는 첫 학년이라니.. 그간 대학이라고는 크게 욕심을 내지 않고 살아왔으나, 모의고사 한 번에 갑자기 대학에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2학년이 되면서 나는 문과와 이과를 선택해야 했는데, 나는 당연하게도 문과를 선택했다. 나는 수학을 좋아했지만 이과의 꽃인 과학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암기과목인 생물, 화학, 지구과학은 극혐이었고, 그나마 수학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물리 정도만 조금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고민도 없이 문과행을 결정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문과에 수포자들이 많을 테니, 차라리 문과에서 수학의 탑이 되자라는 전략이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그런 잔머리를 굴렸던 게 신기하기만 하다.


결과적으로는 그 전략은 기가 막히게 맞아 들어갔다. 문과는 50명씩 3개 반 총 150명이었는데, 모의고사 성적만 놓고 보면 매번 전교 10위권을 유지했다. 그때는 교무실 앞에 항상 모의고사 성적 우수자들을 대자보처럼 붙여 놓았었다. 내 이름은 매번 모의고사 때마다 그 차트에 포함이 되어있었다. 내신 성적은 여전히 중위권에 머물렀지만 수능 모의고사만큼은 영광스럽게 늘 대자보에 들어갔다.


(잠시 여담) 당시에 나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동기가 다른 반에 있었다. 학교 내에서도 그는 인기 스타였다. 반장을 도맡아 했고, 공부도 잘하고, 농구도 잘하고, 리더십도 좋고, 심지어 얼굴까지 잘생겼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모두 아는 친구는 "잘생긴 김OO"과 "뚱땡이 김OO"로 구분되어 불렀다. 그런데 그 교무실 앞 성적 대자보에는 그 친구 이름은 없었고 오직 내 이름만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도 친구들은 모두 그 이름이 당연히 그 "잘생긴 김OO"이라고 단정했다. 그게 나라고 아무리 말해도 거짓말하지 말라며 오히려 핀잔을 줬다. 분명히 반까지 표시되어 있는데, 선생님이 착각하여 잘못 쓴 거라고 확신에 차있었다. 졸업할 때까지 그 이름이 내가 아닐 거라는 논란은 계속되었다. 억울하면 출세해야 한다. (그 "잘생긴 김OO"님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




그렇게 나의 수능 모의고사 성적은 늘 상위권을 유지했고, 드디어 수능 당일이 되었다. 첫 해 수능시험 1993년에는 수능이 2번 치러졌다. 1차(여름) 2차(겨울) 시험 중 좋은 성적으로 가지고 대학에 지원하는 형태였다. 과도기의 시기여서 입시 관리가 조금 허술한 나머지 표준점수가 아닌 절대 점수로 지원을 한다는 것이다. 2차 시험의 난이도 조절이 실패하여 대부분의 학생이 2차 시험 점수가 현저히 낮아, 결국 1차 시험으로 승부를 겨룬 셈이었다. 나는 어이없게도 두 차례 시험을 모두 난이도 조절에 실패하여 결국 모든 대학에 낙방하였다.


재수를 하면서 나는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 학원 다닐 형편도 아니었고, 진득하니 앉아서 공부하는 스타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동네 구립 도서관에서 열심히 문제집만 풀었다. 아마 모든 종류의 사설 모의고사 기출문제 해적판을 모두 구해 미친 듯이 문제를 풀었다. 물론 수학 문제 위주로.


다행히 재수 때는 성적이 어느 정도 나와서 당시 인기 학군인 "라"군의 대표 학교 홍익대학교에 당당히 예비합격 꼴찌 순위로 문 닫고 입학하는 쾌거를 이뤘다. 꼴찌면 어떻고 3등이면 어떠랴, 장학금 아닌 이상 모두가 똑같은 출발선이었다. 또 어차피 점수에 맞춰서 불어불문학과에 들어갔으니 공부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학교 타이틀과 경력을 쌓기 위해 열심히 뛰었고, 결국 불어 한마디 못하는 나는 무사히 졸업에 이르게 되었다.




군대에 갔을 때의 일이다. 나는 176cm에 몸무게 80Kg을 넘는 덩치를 가졌지만 운동을 단 한 번도 한적 없는 약골이다. 그런데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훈련소에서 포병으로 차출되었다. 자대에 처음 배치를 받고 노랑 병아리 견장을 차고 행정반에 앉아 있는데 한 간부가 다가와 물었다.


"자네 어느 학교 다니나"


"이병 김OO! 홍익대학교입니다!"


"오~ 과는 어떻게 되나"


"이병 김OO! 불어불문과입니다!"


"에이, 문과 구만. 안 되겠네. 자네 수학을 좋아하나?"


"이병 김OO! 수학 좋아합니다!" (군대에서 갑자기 웬 수학 타령이람?')


"오, 그래? 그럼 자네 음... 2의 12승이 얼마인 줄 아나?


"이병 김OO! 4096입니다!" (2의 10승 = 1024 → 11승 2048 → 12승 4096)


"(계산기를 두드려보더니) 오 맞았네 합격!"


이 일화는 나의 매거진 <샛복이란 무엇인가> 시리즈에 나온 에피소드인데, 정말 저 10마디도 안 되는 문답으로 나는 포병 사격지휘병에 합격하였다. 사격지휘병이란 한 마디로 적의 위치를 향해 포가 어떤 각도(고각+사각)로 사격을 해야 하는지 계산하는 보직이다. 거리, 위치, 높이, 바람, 기후, 시야를 반영하여 모든 것을 수기로 계산한다. 수식이 엄청 복잡했지만, 나한테는 정말 행복한 2년이었다. 남들은 모두 곡괭이 들고 땅 파서 포다리 심고 하는 시간에 나는 플러스펜으로 죽어라 모의고사 풀듯 계산에 몰두할 수 있었으니...

 



회사를 다니던 시절에도 나의 수학적 사고가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회사를 창업하고 나서 그 재능이 빛을 발했다. 일단 단순히 산수적인 계산법은 이 복잡한 비즈니스 세계에 통용되지 않는다. 내가 하나를 손해 봤을 때, 결국 2개를 얻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어떤 사람은 영원히 깨닫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질 수도 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돈이 전부가 아니다. 비즈니스의 숫자는 그렇게 뻔하게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언젠가 몇 곱절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그 시간은 1년이 되기도, 10년이 되기도 하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행사는 늘 전쟁터처럼 정신이 없다. 그런 현장에서는 늘 갑작스러운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돈과 시간이 핵심이다. 그 긴박한 와중에 문제 해결보다는 그 돈을 누가 낼 것인지 싸우는 신경전을 펼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항상 문제의 해결에 방점을 둔다. 돈은 나중에 정리해도 상관없지만 발생된 문제에는 골든 타임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빠르게 문제들을 해결하고 행사가 잘 종료된 이후 클라이언트 측에서 그 비용 이상으로 결제해 주는 경우가 많다. 혹여 그 문제 해결 비용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들에게 큰 빚을 남겨놓은 셈이니 나로서는 잃을 게 없는 장사이다.


나에게 바둑을 배우면 잘할 것이라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바둑은 당장 눈앞의 ()보다는 5, 10, 20 앞을 내다보아야 한다고 한다. 나의 비즈니스 대국에서는 당장 눈앞의 ()보다 5, 10 앞으로 내다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바보 같은 결정이라며 주변에서 아무리 만류해도 나는  ()  바둑을 둔다.  선택이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패를 발판 삼아  새로운 대국을 펼치고 결국 조금씩 우상향 하는 그림을 그려가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싸움에 능한 나는 지금까지도 숫자로는 누구한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것이 수학 문제를 열심히 풀어서 생긴 능력인지는  모르겠다. 회사의 규모가 30명까지 늘자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져 가지만 항상 발생 가능한 문제를 미리미리 시뮬레이션하며 대비한다.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때리다가 겪을 곤란을 생각하면 조금 피곤하지만 미리 고민해 놓는  안전하다고 믿는 편이다. 이런 삶이 조금은 피곤하겠다고 말들을 하지만 사실 나는 하나도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잦은 ()싸움이 항상 짜릿하기만 하다.


 

즐겁기만한 나의 수학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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