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 관계'에 대한 새로운 정의
회사 생활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갑을 관계'에 대해 자주 들어봤을 것이다. 특히 계약서를 쓰게 되면 '갑'은 어쩌고, '을'은 어쩌고 하는 말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갑'은 의뢰를 하는 사람 혹은 회사(도급자)이고, '을'은 의뢰를 받는 사람 혹은 회사(수급자)이다. 즉, 통상적으로 '갑'은 돈을 쓰는 사람이고, '을'은 돈을 받는 사람이다. 그렇다 보니 '갑을' 관계를 종종 '주종' 관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은 그 '갑을'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한 번 해보려고 한다.
내가 몸담고 있는 업종은 태생부터 대행 업무를 해야 하는 곳이므로 흔히 말하는 영원한 을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런 기존의 질서(order)에 순응하며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시기가 있었다. 회사를 처음 시작했을 때에도 그런 마음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질서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암울한 시기였다.
그러다 현재까지 우리가 계속해오고 있는 이스포츠 대회를 처음 시작하게 되었던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지금껏 우리가 당연시 여겨오던 갑을 관계가 아니라 진정한 파트너로서의 대우를 받게 되니 뭔가 어색하면서도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그만큼 엄청난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는 늘 해오던 것처럼 열심히 했을 뿐인데 그들은 우리에게 항상 감사해했고 우리는 그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하는 긍정의 선순환 현상이 일어났다. 당연하게도 프로젝트를 하면 할수록 같은 비용으로 더 높은 퀄리티가 유지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르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사람도 바뀌고, 시스템도 바뀌고, 무엇보다 신뢰 관계가 많은 부분 무너지는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 더 이상의 존중이라는 것이 남지 않았고, 그렇게 아주 사무적이면서 기계적인 대응만 남았을 뿐이다. 흔히 말하는 '갑을 관계'가 회복되는 순간이었다. 열심히 한들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이 되니 애써 더 열심히 하려는 노력하는 사람이 적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신뢰 관계가 와르르 무너졌고, 상대에 대한 존중(respect)은 점점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같은 일을 해도 존중받던 그 관계, '갑을 관계'를 넘어서 'Partnership'을 유지하던 관계는 이미 온 데 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나 역시도 때때로 어떤 이들에게는 '갑'의 입장이 된다. 우리 회사와 거래하는 수많은 협력사들이 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들을 '을'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또 요즘 흔한 '좋소 기업'들처럼 직원들을 내가 월급을 주며 부리는 '을'이라고 생각한 적인 맹세코 단 한 번도 없다. 만약 나는 그들이 없었다면 현재의 자리에까지 결코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내가 그들의 '갑'인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나의 먹고사니즘을 책임져주는 진정한 의미의 '갑'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평생 업고 다닐 수 있을 만큼 나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살고 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신뢰를 쌓아 갔을 때, 회사는 빠르게 성장할 수밖에 없음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전의 산업 시대처럼 큰 회사에 있으면 '갑'이 되고, 높은 자리에 있으면 '갑'이 되는 그런 구태의연한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나의 회사만 믿고, 나의 위치만 믿고 '갑'의 대접을 받고자 큰소리치면 '틀딱'이니 '라떼'니 '꼰대'니 하는 소리만 듣게 될 것이다. 회사가 아니라, 자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경쟁력과 배려심으로 무장한 개인이 훨씬 대접받고 대우받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자는 결국 또 누군가에게 굴복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을 때 아무도 자신을 돌봐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한다면 내가 정말 어려운 상황에 닥쳤을 때 결코 모두에게 외면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내년부터 우리 회사는 완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게 된다. 지난 6년간 우리는 확실한 캐릭터 구축을 통해 코로나와 같은 정말 극한의 터널도 당당히 뚫고 지나왔다. 그 수많은 과정들 속에 나 혼자 잘 살겠다고 욕심을 부렸다면 우리도 코로나와 함께 땅 속으로 묻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항상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나와 내 직원, 그리고 주변을 살뜰히 챙기며 함께 걸어왔기에 가능한 기적이었다. 이제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완전히 던져버리고 정말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려고 한다. 일단 명확한 계획도 목표도 없다. 다만 분명한 기준은 있다.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보람과 존중받을 수 있는 일,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그런 일을 해보려고 한다. 너무 무책임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6년 전 회사를 처음 시작했던 것부터 이미 엄청나게 무모했던 도전이었다.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처럼 '놀면 뭐해,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다양한 일에 도전해보려고 한다. 내가 아니라 직원들이 주도하는 프로젝트, 진정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도전해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비즈니스를 시도해보려고 한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갈 수 있는 획기적 발상. 그 구체적 계획과 일정은 추후 어느 정도 정리되면 별도의 글로 공개할 예정이다. (많.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