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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봉 Oct 23. 2020

<어떤 방역공백>

  2018년 한 해 동안 노동현장의 사고 사망자 수는 971명, 산재로 죽은 노동자는 2142명, 자살로 숨진 사람은 1만 3670명이었다.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의 노동 현장은 바이러스 감염지역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그래도 그건 불안하지 않았다. 남의 일이었으니까. - 경향신문 2020년 2월 24일 자 채효정 칼럼에서


  몇 번의 방역 고비를 지나, 다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일일 확진자 수가 두 자릿수까지 내려왔다. 이달 15일 하루 동안 47명이 새로 확진됐고 사망자는 2명이었다. 이번 주부터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1단계로 낮아져서 답답한 삶은 조금은 덜 답답해지게 됐고, 일상을 조금 떠올려 보기도 하는 참이다.


  그래도 마스크는 다들 열심히 쓴다. 올해 초와 비교하면 지하철 풍경은 유독 생경하다. 지독한 황사라도 생전 마스크 써본 일은 없었을 것 같은 꼬장꼬장한 어르신도, 바이러스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 따윈 없을 것 같은 근육맨 청년도, 메이크업을 꼼꼼하게 한 여성도 군말 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 (물론 가끔 마스크를 안 쓴다는 소란이 뉴스에 나오기는 하지만.) 개찰구에 교통카드를 찍을 때면 “삑” 소리와 함께 “마스크를 착용하세요” 안내 목소리도 나온다. 3~4월쯤엔 집을 나섰다가 ‘아차, 마스크’ 하고 돌아와 마스크를 챙겨 다시 나가곤 했는데 지금은 ‘아차’ 마저도 안 한다. 스마트폰을 놓고 다니지 않는 것처럼. 악수를 하지 않거나, 손을 꼼꼼히 씻는 일, 자리를 띄어 앉는 일 따위도 모두 그 정도로 익숙해졌다.


  국내에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게 올해 1월 20일이었으니, 열 달 만에 함께 달라진 일들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우리를 이토록 뭉치게 만들었다. 3월 대구나 8월 서울을 중심으로 한 몇 차례의  ‘방역 위기’ 속에서 이 공포는 모든 ‘나’ 들을 위협하기 충분했다. 이 저지선이 뚫리면 죽음이 내 코앞에도 닿을 수 있다는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 앞에서는 뭉치는 게 당연했다.”라는 명제가 참이었다면 멋지고 희망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렇지 않다. <‘내 죽음'에 대한 공포>라고 하면 비로소 참이 될 것이다.


  고용노동부 통계를 더 찾아보니 산재 사망자는 올해 상반기(1~6월)에만 470명이다. 아직 올해가 두 달 정도 남았지만, 이 분위기 대로라면 코로나19 사망자보다는 산재 사망자가 훨씬 많을 가능성이 높다. 이 죽음의 숫자는 꾸준하기도 하다. 2015년(955명), 2016년(969명), 2017년(964명)에도, 2018년(971명), 2019년(825명)에도 일터에서 사람들은 이렇게나 죽었다. 산재 질병으로 인한 사망을 포함하면 사망자 수는 훨씬 더 많다. 2018년, 2019년 모두 사고나 질병으로 각각 2000명 넘게 죽었다. 자살 수치는 더 믿기 힘들다. 지난해 자살 사망자는 1만 3799명이다. 하루에 37명 넘는 사람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죽음의 숫자로 경중을 메길 수는 없지만, 수치로만 보면 이쪽은 심각한 방역 공백이다. 장기화됐으니 방역 실패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도 다들 모르쇠다. 나부터도 칼럼을 읽으면서 야 새삼 놀랐다. 뭉쳐서 죽음에 맞서야 한다는 생각이 여기서만큼은 예외다.


  기이한 일이다.  825(산재), 1만 3799(자살) 같은 숫자들은 441(코로나19)과 무엇이 다른 걸까. 왜 앞의 두 숫자는 두렵지 않을까. 뒤의 숫자는 분명한 '국가적 위기'인데, 앞의 숫자에 대해서는 '위기'나 '심각', '엄중함' 같은 단어들이 쓰이더라도 공중에 떠돌아다니는 느낌이다, 인사치레처럼.


  더 주목받는 숫자를 승냥이처럼 따라다니는 언론이나 정치의 소산이라고만 해버리면 속 편하겠지만, 불편하게도 거기서 끝은 아닐 테다. 어쨌건 그건 남의 일이었으니까. 남의 일에는 ‘괜찮다’라는 전제가 담겨있으니까.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지 않는 TV 속 등장인물들을 손가락질하고 나의 방역수칙 준수를 뿌듯해하면서도, 올해 상반기에 죽은 470명에 내가 낄 일은 없었으니까. 철저하게 나에게 전염되지 않는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세상은 이렇게도 단순하고 가혹한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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