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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봉 Feb 25. 2019

광주

-슬픈초상

1.아버지는 빚에 시달렸다. 갚아지지 않고 갚을 방법 없는 빚 때문에 힘들어했다. 

‘광주’ 이야기를 꺼낼 때면 그랬다. 1980년 5월의 광주. 누군가 죽어서 온 세상. 그때 앞에 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진 자리에서 질기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빚이라고. 


2.전라도 광주에 다녀오셨던 날, 망월동의 5·18묘역에서 본 아버지 친구얘기

-이 이야기를 할 때는 아버지는 코끝이 찡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지 친구도 1980년 5월 광주에서 죽었다. 전주에서 아버지와 함께 대학을 다니던 친구였는데, 고향에 내려갔다가 학교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 친구의 묘지에는 친구의 얼굴사진이 있었는데, 아직도 앳된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기억하던 대학생모습, 그 얼굴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있었다. 아버지는 친구야, 친구야 부르면서 울었다. 50대의 끝자락에서 흰머리와 늘어난 주름이 야속한 아버지는 여전히 파랗게 앳된 친구의 묘지 앞에서 울었다. 아버지가 산만큼 친구는 살지 못해서 아버지는 더 산 세월이 끝끝내 미안하다고, 늙은 모습으로 울었다. 


 3.어제(19년 2월 23일) 서울 종로의 청계광장에 5000여명이 모여들었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의 개입이 있었다는, 때 아닌 망언에 상처를 받은 이들이 그러면 안 된다고 모여들었다. 그래놓고도 5000명은, 야속하게 지는 말을 했다. 1980년에 시민군이었다는 그 사람은 “그때 광주에서 죽은 사람들 덕분에 저런 망언도 내뱉을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것”이라고 했다, 화내지 못했다. 바보 같은 5000명의 정의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길 하나를 가운데 놓고 맞은편에 보수단체 회원 30명이 5000명을 공격했다. 그들은 “5·18유공자들 중에 가짜가 많다고, 색출에서 모가지를 썰어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이 무서웠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벌어진 상처에 더 아프라고 소금을 뿌릴 수 있다는, 그런 끔찍한 현장이 여기구나, 지옥이구나. 사람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무너져버려서, 나는 슬펐다. 

  의경들이 형광초록색 조끼를 입고 30명과 5000명 사이를 갈라섰다. 30명이 “가짜유공자!” 라고 하면 5000명이 “진짜유공자!”라고 말했다. 이날 청계광장엔 경찰들을 사이에 두고 각각 슬픈 초상들이 천지였다. 나는 그 사이를 돌아다니고 취재 하면서, 이 슬픈 초상들을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버렸을 때, 이 현장이 너무 막막해서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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