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디 무용한 것을 사랑하오.

너의 냄새가 좋아.

by 돌터졌다

며칠 뒤면 내 생일이다.

요란하게 생일파티까지는 안 해도 스스로 주는 선물을 고를 때 행복하다. 남이 주는 선물도 물론 좋지만 나보다 내 생일이 의미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나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내 생일 선물로 산다.


올해는 뭘 살까 하다 향수를 골랐다.

소녀적에는 향수를 수집하기도 했지만 사용해본 적은 없었다. 예쁜 병 따위를 모으며 만족하는 정도였다. 남다른 취미 하나쯤 갖고 싶은 소녀의 허영심에 불과했다.

마스크를 항상 착용하는 요즘 하필 향수라니. 어처구니없게도 올해 생일에는 갖고 싶었지만 내게 가장 쓸모없는 것을 주고 싶었다. 그게 향수였다.






너의 냄새가 좋아.



대학교 1학년 겨울 동아리방은 많이 추웠다. 동기들과 나란히 앉아 쓸데없는 수다를 떨면서 소름이 돋았다. 발이 시려워 그만 나가야겠다 싶었을 때 앞에 앉은 동기 녀석이 자신이 입고 있던 가죽 재킷을 벗어 주었다. 그 친구도 추울 텐데 내 사정이 급했던 나는 염치없이 받아 들었다. 보는 눈이 한 두 개가 아닌지라 입지는 못하고 무릎에 푹 덮으니 따땃하니 그만이었다. 게다가 좋은 냄새가 났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눈감으면 아마존 밀림 어디쯤에서 그날 먹을 열매를 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짙은 나무향과 가죽의 냄새가 묘하게 섞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이 친구가 손수건을 빌려줬을 때도 이런 냄새가 났었다. 샌들우드가 베이스 노트인 향수를 떠올렸지만 이런 향은 기억에 없었다. 공손히 가죽재킷을 돌려주면서 향수 뭐 쓰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대신 주말에 백화점에 가서 샌들우드 향을 시향 하면서 비슷한 냄새를 찾으려고 했다. 가느다란 시향 지를 몇 개를 흔들거려봐도 이 향도 아니여. 내려놓고, 이 것도 아니여. 내려놓고 아까 그 향이 맞는가? 싶었다.





마루 냄새



6,7세의 여자아이가 부모 없이 시골에서 할 일은 아주 많았다. 충남 외할머니댁에 맡겨진 내 여름과 겨울은 지금 생각해도 환상적이었다. 내가 그 작은 시골마을을 휘저어 놓은 솜씨는 다시 떠올려도 아찔할 정도다. 까맣게 그을린 피부와 동글동글한 머리통을 한 깡마른 여자아이는 흔적 없이 어른들을 골탕 먹이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해리포터까지는 아니어도 미스 페레그린이 돌보는 아이들처럼 개성 넘치는 친구들이 있었다. 놀다 지쳐 널브러져 있으면 어른들이 지나가면서 나를 꼭 찝어 말을 거셨다.


"니가 00이 딸 맞지? 머리통이 똥그란 것이 영 제 에미랑 똑같네."

"기여. 생긴 것이 아조 아그데데한 것이 깜찍하다이"

"너 오삼춘한테 얼마나 인삼을 받아먹었으면 그렇게 쌩쌩하냐. 어지간하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얼굴들이 나를 단박에 누구 딸이라며 가리켜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곤 점빵 가서 사 먹어라 하면서 돈을 주기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인사 한 번만 하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더위 먹은 개마냥 혀를 빼고 외할머니 집으로 돌아와 씻지도 않고 벌러덩 긴 마루에 누워버렸다. 서늘한 마루는 내 몸을 식혀주었고 등이 차가워지면 몸을 뒤집어 엎드렸다. 얼굴까지 마루에 대고 누워있으면 냄새가 났다.


마루 냄새.


이른 아침 부엌에 들어가면 나는 냄새 같기도 하고 아까 뛰어놀던 인삼밭에서 나는 냄새 같기도 했다.

살짝 늙은 할머니 옷 냄새 같기도 했다. 할머니를 따라 찾아간 절에서 방석을 깔고 앉으면 사방에서 풍기는 냄새와 비슷했다.


마루에 코를 박고 누워있으면 코가 시원해지면서 죽순처럼 내 몸이 죽죽 늘어나는 것 같았다.


내가 살던 도시에선 맡을 수 없는 냄새였다. 한 뼘도 크지 못하고 쭈그러들어 지내는 엄마 집에서는 나지 않는 냄새였다. 이 냄새를 맡아서 쑥쑥 키를 키우고 몸을 불려 엄마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다음번 할머니 집으로 가기 전까지 여기저기 킁킁거리며 헤매고 다녔다. 그 마루 냄새 한 번만 맡으면 살 것 같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코가 뻥 뚫리고 키가 주욱 늘어날 건데 도시는 내 편이 아니었다. 누구도 내가 00이 딸이란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어쩌다 전철에서 훅 하고 스치는 냄새에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 두리번거리면서 냄새를 찾았다. 오래전 따뜻한 가죽 재킷에서 풍겼던 냄새다. 순식간에 추운 동아리방으로 돌아가 쭈그리고 앉은 내가 되어 맞은편에 앉은 그 아이를 바라봤다. 따땃한 가죽재킷을 건네는 그 아이의 얼굴이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냄새만, 냄새만 내 코를 파고들어 간질거린다. 흔적만 남기고 냄새가 사라지자 내 몸도 같이 돌아와 전철 안에 서서 흔들거리고 있다. 냄새를 잊지 못해 멈춰 선 나와 상관없이 전철은 냉정하게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잊지 못할 하루였지. 다 뒤져도 못 찾았던 그 냄새를 맡았으니, 세상에 있는 냄새라는 걸 확인했으니 그걸로 기뻤다. 오로지 그 아이한테만 나는 냄새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언젠가 또 내 코끝을 찾아오겠지 위로했다.

퇴근하면서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00 씨와 나란히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별 말이 없던 그가 먼저 차에 올라탔고 곧이어 내가 조수석 문을 열었고 두 다리가 휘청거렸다.

"왜 그래요?"

그가 운전석에서 나를 올려다본다. 황급히 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는데 코 끝이 찡 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 꽉 찬 호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차에서 냄새 많이 나죠?"


00 씨가 씩 웃는다. --아뇨. 뭐 별로.-- 코로 후욱 숨을 들이마시던 내가 말을 흐렸다. 미치게 반가웠다.


"미안해요. 환기를 시켰어야 했는데. 어제 방향제를 새로 달았는데 냄새가 너무 독하네. 문 좀 살짝 열게요."


내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베이스 노트가 샌들우드였던 그 가죽재킷 냄새가 차량 방향제 냄새였다는 사실에 감격이라도 한 듯이 방향제를 만지작거리며 한 마디 하고 말았다.


"그러게요.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독하네요."




"이거 1병에 오천 원인데 2병에 8천 원에 줄게 가져가요."


역전 근처 육교 위는 할머니들이 주섬주섬 챙겨 온 것들을 팔고 있었다. 친구가 약속에 늦어 20분을 때워야 했던 나는 서점 대신 육교를 올랐다. 부족한 운동량을 채우기 위해 좋은 방법이라며 스스로 흐뭇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들고 온 대야보다 더 작고 초라한 몸으로 시멘트 바닥에 앉아 보잘것없는 것들을 파는 할머니가 있었다. 아이고 할머니 요즘 사람들은 이런 거 안 사는데. 소리가 목구멍에서 간질거렸다.

사람들이 필요로 할 물건을 파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걸 팔아야 하는 것이 이 할머니의 목적이다.

입바른 소리는 넣어둬야 했다.

시간은 아직 15분이나 남았고 하릴없이 육교를 서성이던 나는 넉살 좋게 할머니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동무가 되어 드렸다. 일어설 때엔 이삼천 원짜리 때타월이나 면봉 따위를 살 작정이었다.


할머니 이거 뭐에요? 작은 병에 담긴 액체가 궁금했다. 약은 아닐 테고 세제인가?


"이거 1병에 오천 원인데 2병에 8천 원에 줄게 가져가요. "

"이게 뭔데요?"

"응 목초액이야. 목초액. 이거 진짜 좋아."

"어디에 쓰는 건데요?"

"무좀에도 쓰고 아토피에도 좋고 해충 죽일 때도 쓰고. 다 좋아."


아니 할머니이이... 아토피에 좋은데 해충도 죽여요? 살리고 죽이고 다 하면 뭐 성분이 뭐란 거에요? 피식 비웃듯이 병을 만지던 내가 슬쩍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할머니?"

"응?"


정색을 하고 할머니를 부른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았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마루 냄새가 났다. 그것도 아주 찌인하게.

할머니가 시골의 마루 바닥을 모조리 끓여 추출이라도 해온 마녀 같아 보였다. 쳇, 어릴 적 나를 키운 그 냄새가 이렇게 고농축 원액으로 그것도 한 병에 오천 원이란 저렴한 가격에 내 손에 있다니.


"한 병만 주세요."


목초액의 성분을 검색한 나는 차량 방향제만큼이나 흔하디 흔한 그 냄새를 따라 단돈 오천 원에 어린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향기도 시간이 지나면 날아가는 법. 사람은 영리하게 그 향기를 잡아내어 작은 병에 가두는 법을 알고 있다. 누군가는 인위적인 향기에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지만 단 한 방울의 그 향기로도 누군가는 오래오래 소중했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


날아가는 향기, 이미 지나온 추억. 모두 내가 억지로 붙들 수는 없는 것들이지만. 분명히 내게 존재했던 것들.

더 이상 현재의 나를 간섭할 수 없는 그것들은 냉정하게 무용한 것이 사실이다. 무용하나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흔하디 흔한 오천 원의 가치라도 더없이 귀하고 사랑스럽다.









"봄이 왔나 보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여기 다 있구려... 난 이리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봄. 꽃. 달....... 난 날마다 죽소. 오늘의 나의 사인은... 화사요."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김희성의 대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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