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12일 차, 오늘의 일기
교회 청년부 수련회 답사를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일찍"이라지만, 직장인들의 출근 전쟁이 한풀 꺾인 오전 9시 10분. 동인천역의 고요한 플랫폼이 이토록 반가울 수 없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시원한 공기, 때마침 도착한 버스. 어제 하루 집에만 있었을 뿐인데, 마치 며칠 갇혀 있다 풀려난 사람처럼 세상이 새롭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것이 바로 백수가 누릴 수 있는 특권, '평일 오전의 상쾌함'인가보다.
일행과 만나기로 한 오류동역까지 가는 길, 지루함을 달래려 유튜브를 켰다. 요즘 푹 빠져 있는 채널 '머니그라피'의 <B주류 초대석>을 재생했다. 김간지, 허키, 김민경, 이 세 사람의 티키타카는 언제 봐도 맛깔스럽다. 시사교양을 표방하지만 매운맛 토크가 섞인 이 콘텐츠는 1시간짜리 롱폼이라도 순식간에 삭제해버린다. 오늘의 주제는 '인생 만화 설명회'. 출연진들이 각자의 '인생 원픽' 만화를 소개하며 반짝이는 눈으로 열변을 토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내가 보지 않은 만화라도, 누군가의 확고한 취향을 엿듣는 건 묘한 즐거움을 준다.
그들의 열정에 전염된 탓일까. 나도 문득 나의 '만화 취향'을 꺼내보고 싶어졌다. 비록 '덕후'라고 자부할 만큼 많이 보진 않았지만, 내 기억 속에 강렬하게 박제된 작품들을 소환해 본다.
1. 데스노트 (Death Note) 명작 중의 명작. 라이토와 L의 치열한 두뇌 싸움은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평범한 인간에서 스스로 '신'이 되려다 악인으로 타락해가는 라이토. 하지만 묘하게 그를 응원하게 되는 모순적인 감정 속에서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너무 좋아해서 영화는 물론, 뮤지컬까지 챙겨봤다. (홍광호 배우의 라이토는 정말이지 완벽했다.)
2. SA : 스페셜 에이 어릴 적 애니맥스 채널을 돌리다 멈추게 만든 추억의 애니메이션. 명문고의 최상위 성적 우수자들을 모아놓은 'SA반'에서 벌어지는 풋풋한 로맨스다. 정확한 내용은 흐릿하지만, 채널 고정하게 만들던 그 설렘만은 선명하다. 글을 쓰며 이미지를 찾아보니 내 기억 속 예쁜 그림체와 달리 너무나 '옛날 순정만화'스러워서 놀랐다. B급 감성 한 스푼을 더하자면 이 작품이 떠오른다.
3. 코드기어스 소설로 먼저 접하고 애니메이션은 맛만 본 작품. 로봇에 탑승해 싸우는 왕권 국가 이야기인데, 결말이 꽤 충격적이었다. 악역을 자처하던 주인공이 결국 가족을 위해 모든 오명을 뒤집어쓰고 희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의 왜곡일 수도 있지만, 그 비장미만큼은 강렬했다.)
만화 전문가들이 보면 코웃음 칠 얕은 리스트일지 모르지만, 뭐 어떤가. 취향에 정답은 없다.
유튜브가 끝나기도 전에 일행을 만나 강화도로 향했다. 가는 내내 뚜렷한 주제 없이 웃고 떠들었다. 오랜만의 드라이브, 낯선 식당에서의 점심, 그리고 도착한 수련회 장소. 이곳은 내 취향을 저격했다. 배산임수. 뒤로는 산이 든든하게 받쳐주고, 앞으로는 강화도의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 곳. 원래 예약하려던 예배당이 성에 안 차 30만 원이나 더 비싼 곳을 선택했지만, 세 사람 모두 망설임이 없었다.(가격에 망설이긴 했지만 예약에 동의 할 수 밖에 없는 컨디션은 포기 못해) 리모델링 된 깔끔한 시설과 창밖 풍경을 보니 돈이 아깝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한 취향을 넘어선, '최고의 선택'이었다.
요즘은 바다보다 산이 보이는 풍경이 좋다. 수련회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아 마음이 분주하지만, 오늘의 답사는 나에게 작은 환기가 되었다. 쉬는 동안 나를 돌보는 일에 더 정성을 쏟아야겠다. 운동도 하고, 햇볕도 쫴주고, 긍정적인 마음을 심어주는 일. 상황이 허락한다면 여행을, 안 된다면 오늘 같은 드라이브라도 나에게 선물해야지.
지난 11년간, 나는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쉼 없이 달려온 탓에 갑자기 주어진 이 막대한 자유 시간이 당황스럽기도 하다. 퇴사라는 결심은 했지만, 정작 비어버린 시간의 틈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깊이 고민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알 것 같다. 이 시간은 단순히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 취향을 더 견고하게 쌓고 '나'라는 사람을 입체적으로 조각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나 사용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를 위해, 그리고 언젠가 만날 나의 배우자를 위해. 취향은 그렇게 하루하루, 나이테처럼 쌓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