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하게 망해본 자만 아는 진실

퇴사 59일 차, 오늘의 일기

by 김시온

어제는 교회에서 레크리에이션 진행을 맡았다. 태어나서 두 번째로 잡아본 레크리에이션 마이크였다. 첫 번째 기억은 참혹했다. 야심 차게 직접 창작한 게임을 들고 갔지만 룰은 지나치게 복잡했고, 분위기는 중간부터 걷잡을 수 없이 루즈해졌다. 도저히 미화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망했다. "이게 대체 뭐야?" 하던 청년들의 그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청년부 인원이 그리 많지 않기에, 언젠가는 이 쓰디쓴 잔을 다시 마셔야 할(?) 날이 올 거라 막연히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는 청년부 회장이라는 책임감으로 다시 진행을 자원했다. 사실 삼일절 연휴 수련회 때, 임원이 아닌 다른 친구들에게 진행을 반강제로 부탁했었다. 그 미안함 때문에 이번엔 내가 먼저 선수 친 것도 있다. 3주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하다 보니 물리적인 부담은 없었다. 다만 "앞에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심리적 압박이 문제였는데, 신기하게도 예전만큼 두렵지 않았다. 첫 번째 진행을 망쳤던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레벨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느끼는 부담감은 과거의 트라우마가 남긴 잔상일 뿐, 대중 앞에 서서 무언가를 주도하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레크리에이션 당일, 준비한 대로 차분히 게임을 이끌어갔다.

https://blog.naver.com/inpersonal/224226539621


1라운드: 인물 퀴즈 화면에 뜨는 연예인 사진을 보고 빠르게 이름을 외치는 게임. 스피드가 생명인데 화면을 빠르게 넘기는 타이밍이 조금 어설펐다. 다음엔 PPT 담당자와 사인을 확실히 맞추거나 내 손에 리모컨을 쥐어야겠다는 피드백을 얻었다.


2라운드: ET 릴레이 인스타그램 기독교 계정에서 본 게임을 살짝 변형했다. 2인 이상이 긴 사물 양쪽 끝에 검지손가락만 대고 릴레이로 운반하는 협동 게임이다. 생각보다 반응이 폭발적이라 안도했다. 첫 번째 진행 때의 싸늘했던 공기와 완벽히 대조되며 굳어있던 내 마음도 편안하게 풀렸다.


3라운드: 변형 빙고 게임 25명 남짓 꽉 찬 방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앉아서 하는 빙고를 택했다. 일반 룰에 '팀원 전체 3빙고 시 점수 2배'라는 조건을 추가해 역전의 여지를 만들었다. 다음 일정 탓에 시간에 쫓기듯 진행했고 점수 집계가 매끄럽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지만, 다음엔 집계 방식만 보완하면 완벽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던 무대를 스스로 자원해 정면 돌파하고 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듯하다. 흥미로운 건, 그동안 내가 레크리에이션 진행 스킬을 따로 연습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대신 나는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 과정에서 자존감이 높아졌고, 스스로를 믿는 자신감이 채워졌으며, 다양한 경험에 열린 마음을 갖게 되었다. 꼭 무언가를 잘하고 싶다고 해서 그것만 파고들 필요는 없다. 때로는 그것을 잘 담아낼 수 있는 '주변 능력치'를 끌어올리는 것이 핵심이 되기도 한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런 말을 했다.


"내게 나무를 벨 여덟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중 여섯 시간은 도끼의 날을 가는 데 쓰겠다."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행하는 것. 독서와 글쓰기는 내게 나무를 베기 전 도끼날을 시퍼렇게 가는 시간이었다. 그 갈고닦은 시간이 마침내 긍정적인 결과로 돌아온 것이다.

도전했다가 잘 안 되면? 그냥 '좋은 경험 하나 했다' 치면 그만이다. 바닥에 주저앉아 낙심해 봐야 아무도 나를 대신 일으켜주지 않는다. 내 실패를 향한 누군가의 손가락질은 그저 잠시 스쳐 가는, 실체 없는 바람일 뿐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타인의 실패에 깊은 관심이 없다.


그러니 우리는 무조건 자꾸 부딪혀봐야 한다. 그리고 그 경험과 감정을 반드시 글로 적어보길 바란다. 단순한 일기 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쓰다 보면 아쉬웠던 순간을 복기하게 되고, "이렇게 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라며 개선점을 찾는 '자기 발전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 기록들이 쌓여 나만의 단단한 콘텐츠가 되고, 훗날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넬 수 있는 진짜 경험 자산이 되는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록하는 자의 도끼날은, 결코 무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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