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파민 중독 치료기_2

어느날 양배추가 보였다.

by 한여름꿈

오랜만이든 며칠만이든 만나는 누군가들은 작은 것부터 시작해 큰 것, 흥미로운 것부터 시작해서 예의상 들어주는 이야기들까지 갖가지 소식과 소문과 이야깃거리들을 들고 온다. 이야기들 속에 있는 동안 나는 이렇게 내게 소식을 들려주는 누군가가 있어서 고마운 것이 아니라 왜 그 에피소드들의 장소와 시간과 사람들속에 내가 없었을까를 생각했다. 정확히는 없었다가 아니라 초대받지 못했다는 오묘한 기분이었다.


숏폼과 SNS를 통해 내가 느낀 감정이 아주 널뛰는 흥분이나 그 반대의 감정이 아니었듯이 역시 그런 이야기들 속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도 큼직한 것은 아니었지만 인지하기 전까지는 상관없었을 에너지를 온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내는 스트레스는 분명있었다. 한 사람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하면 두 사람 중 한명의 이야기는 다시 이어지고, 그 한명이 다시 두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면 그 두 사람중 누군가는 다시 연결고리가 된다.

대화를 나누며 점점 직간접적으로 아는 이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일상들이 점점 확대되고 나는 관계에 집중하며 생각의 관찰을 하다가 끊어내지 못할 그물망같은 인연관계에 생각의 생각을 거듭하게 된다.


수없이 쏟아지는 일상과 사건과 축하하거나 부러워해야 할 일들의 대화속에서 나는 혼란스럽고 아득해진다.

가끔 이런 피로도를 토해내면 주변인들은 '뭘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해?' 또는 '나는 그냥 재밌는데?'라는 반응이었다.


누군가의 삶에 대해 알게 되고 인식하고 이해하는데 정신적 에너지가 들어가야만 하는 나는 쿨하지 못한 프로예민착하지만꼰대가 되어있었던걸까?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끊임없이 불신하며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자기검열을 해야하는 그 기준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걸까.


간헐적으로나마 하던 SNS와 대체제로 달고 살던 숏폼을 아예 끊고 100시간 정도가 지났다.


무료하기는 한데 심심해죽겠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원래 출근시간까지 3-4시간이 남으면(나는 직업 특성상 늦 오후에 출근을 한다) 늘 바빴다.

시간계산을 할 때는 그렇게 바쁘지 않았던 시간인데 늘 매일 바빴다. 그때는 그랬다.

점심시간쯤이 되었다. 출근까지 똑같이 3-4시간이 남았다.

SNS와 숏폼을 보지 않으니 휴대폰으로 할 일이 딱히 없었다. 인터넷 기사거리도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지역카페에 들어가 몇가지 궁금한 글들을 뒤적거리다 더 볼 것도 없어서 휴대폰을 엎었다.


밥을 차려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닌데 냉장고를 열었을 때 지난주에 산 양배추 한 통이 보였다.

간혹 아침에 주스를 갈아마실 때가 있는데 그때 넣어서 먹어야지, 라며 평소 하지도 않았던 생각을 하며 샀던 양배추였다. 가격차이가 얼마 안나 반통이 아닌 한 통을 샀는데 생각보다 너무 커서 놀랐다. 언젠가 먹겠지 하며 넣어두었다. 사실 그렇게 쌓아두고 버린 음식재료가 한 둘이 아니다. 지난 식재료와 마찬가지로 양배추는 언젠가부터 지금까지 계속 거기 있었을 것이다. 음료든 과일이든 맥주든 무엇을 원할 때 수없이 열었던 냉장고였는데도.


문득 양배추에게 관심이 생겼다.

자주 해먹지도 않는 출근 전 점심인데(보통은 레토르트 식품으로 간단히 해결한다) 오늘은 점심을 해먹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리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양배추를 오늘의 점심 어디에 써야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출근전까지 3시간이나 남았으니까.


양배추를 감싸고 있는 비닐을 옆구리만 살짝 벗겼다. 실하고 튼튼하고 견고한 뭉침. 처음 만나는 생명처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일회용으로 소분된 훈제오리에 볶아먹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적당한 양을 전혀 가늠할 수 없지만 일부를 잘라내고 다시 원래 쌓여있던 랩으로 붙여 넣어둘 요량이었다. 그런데 요리조리 양배추를 둘러보다가 '어차피 출근까지 3시간이나 남았는데' 하며 비닐을 몽땅 벗겨냈다.


'바깥 껍질도 벗기는 건가?'

'안쪽은 단단하게 모여있고 깨끗해 보이는데 씻는건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귀퉁이 일부를 거의 쓰지않는 큰 칼을 꺼내어 숭덩 썰어냈다.

단단한 뭉쳐짐에 비해 생각보다 시원하게 잘려나간 양배추 옆구리에서 신선한 냄새가 올라왔다.

일부를 잘라내고 보니 생각보다 양이 너무 많아서 놀랐다. 얼른 남은 랩으로 봉합해서 냉장고에 넣으려고 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늘 내가 랩으로 봉합한 것은 사실 '아마도 다시 찾지 않을 것 같지만 일단 나는 최선을 다했어'라는 느낌이었다는 것.


나는 양배추를 소분하기로 했다.

집에서 김치를 얻어올때나 쓸 법한 큰 유리통을 꺼냈다. (그래봤자 김치 2포기 분량이다.)

숭덩숭덩 양배추를 썰었다. 커다란 뭉침이 속으로 썰리자 작은 파도의 물결처럼 흩날리는 조각들로 부서졌다. 아직 1/3도 안썰었는데 그 통이 꽉차 버렸다. 흩어지자 불어나는 부피에 제법 놀랐다.

다시 큰 비닐팩을 꺼냈다. 남은 것들을 써는데는 좀 더 자신감이 붙었다. 썰어가면서 큰 비닐팩을 두개를 더 꺼내야 했다. 칼질을 거의 하지 않아서 도마도 꺼내지 않고 대강 주방 상판에서 칼질을 했는데 하다보니 혹시 상판에 칼질 자국이 남았나 꺼져가는 모닥불을 살피는 사람마냥 고개를 상판에 옆으로 붙이고 들여다보기도 했다. 밥해먹으라고 만들어 둔 생활의 공간인데 양배추 써는 것보다 다른 일이 더 효율적이라 생각하며 살았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소분에 소분을 거듭하니 양배추는 태어나 자라 내게 온 몸집의 3-4배는 되는 부피가 되었다.


담고 썰고 담고 썰고 담고 썰고 자지구레하게 남은 것을 치우며 마음속으로 이런 간단한 생각이 들었다.


"음, 다음번에는 반통만 시켜야겠다."


혹시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나의 저 생각을 공감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생각과 걱정이 아주 많은 사람이다. 불안도도 높고 목표지향 어쩌고 아무튼 그런 사람이다.

세상과 비전과 삶과 지혜와 자기개발과 그 걱정을 하느라 동반되는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나는 게임도 하지 않고 이런저런 유흥도 즐기지 않고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번아웃을 "고치고" 싶어서 이것저것 기웃거려보지 않은 것이 없고, 우울감을 벗어나려 미친척 거짓 취미에도 빠져보고(물론 거짓이라 생각을 한 건 아니다, 내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은 했다) 왜 '좋아하는 일'이 없을까 고민을 매일 했던 사람이다.


뇌가 안온함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는 생각의 변화를 느꼈다.

'생'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나를 발견했다.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드는 대신에 의식적으로 통제를 하며 생각보다 하루가 꽤 길다는 것을 알았다.

숏폼을 보며 보내는 시간이 하수구에 흘려보내는 물줄기 같았다면 그 시간을 정지상태로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은 마치 샘물같은 느낌이었다. 관심. 나의 시간과 나의 지금과 나의 감각에 대한 관심.

무료함을 이기려 나는 나의 관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은 그 대상이 양배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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