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km, 생의 감각

-무료함의 반대말은 '불행을 에너지로 삼는 것'이다.

by 한여름꿈

한여름의 달리기는 무르익고 무르익어 주변인들이 내게 종종 그런 말을 해오기 시작했다.

-한여름에 달리기를 한 사람은 가을에는 날아다는다고 하던데요.


난생 처음으로 올림픽 마라톤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다. 그저 끊임없이 달리기만 할 뿐인 스포츠를 지켜보는 이유와 그 재미를 찾고 싶지도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달리기를 하다보니 관심이 자연스레 생겼다. 2024년 올림픽은 파리의 도심을 달리는 마라톤이었다. 그동안은 마라톤 코스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지역이 지역이니만큼 그들의 발길을 따라 파리의 도심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쉼없이 움직이는 발놀림들의 힘찬 움직임을 지켜보는 재미도, 그토록 강인한 체력과 지구력을 가진 이들이 기온, 신발의 불편함 등 생각보다 작은 이슈로 기록이 엉키거나 중간에 달리는 것을 멈추는 모습을 보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예전에는 아주 헝그리한 스포츠였던 것 같은데 이제는 모두 깔끔하고 인체의 능력을 향상시켜 줄 집념이 나날이 업그레이드 되고 있는 각종 스포츠웨어를 착용하고 달리는 모습과 그들의 즐겁게 달리는 모습도 내 나름 상큼한 기분이 들게 하는 포인트였다. 그냥 그저 달리는 것 같은데 1시간 2시간의 중계가 이상하게 재미있었다.


중계를 하는 아나운서가 말했다.

-아, 오늘 파리의 온도가 14도인데요, 이건 선수들이 아주 힘들어 할 온도인데 말이죠.


그 발언에서는 나도 모르게 응? 하는 자세로 몸을 고쳐 앉았다.

이번 여름 기간 내내 내가 달리기를 하는 온도는 평균이 30도를 웃도는 날씨였다. 너무 뜨겁거나 너무 습하거나 아니면 둘 다였다. 선수들의 달리기의 속도의 절반에도 내 속도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온도의 힘듦을 느낀 것은 그래도 비벼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내 나름의 고통이었다. 본격적인 초여름이 오기 전까지 비슷한 시간에 자주 만나던 러너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진정한 초보 러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유려한 물고기처럼 적정 온도와 적정 시간에 그들이 있을 곳을 아는 사냥꾼같았다. 그 시간을 모르고 그저 달려야만 한다고 생각한 나는 계절이 어떻게 바뀌든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를 같은 강도로 그저 달리고 달렸던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소위 말하는 '내복'이라는 것을 한번도 입어본 적이 없다.

더위가 주는 이상한 열정과 낮이 긴 계절의 정열이 좋아서 열렬한 여름의 팬인 나는 겨울을 그만큼이나 싫어하고 추위를 힘들어 한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내복이나 패딩을 입고 다닌적이 없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너무나 추위가 싫기 때문에 추위를 방어하는 만큼 추위가 주는 공포가 더 커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침실이 따뜻할 수록 이불을 걷고 거실로 나오는 것이 힘들고, 포근함이 깊을수록 거친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힘들기에 나는 처음부터 따뜻함과 포근함을 없애는 편을 택했고 그래서 겨울에도 보일러를 잘 틀지 않고 약간 춥게 잠자는 것을 선택했다. 일을 한참 미친듯이 할 때는 잠을 줄이는 것은 물론, 여러이유로 밥을 굶었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커피를 쏟아부었다.


스스로를 약간은 불쌍하게 만드는 것의 좋은 점은 단련이 된다는 것이고,

단점은 스스로를 불쌍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일에 미쳐 살던 어느날 배가 간헐적으로 너무 아프기 시작했다. 고통의 역치를 높일만큼 높혀놓은 상태로 살던 시기였기에 만약 지금 그 고통을 느낀다면 얼마나 아프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견딜만 하다 생각했었다. 일주일은 참았고 다음 일주일은 한의원과 근처 내과를 갔고 다음 일주일동안은 일하는 복사기 앞에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가벼운 체기나 소화제를 처방해주었던 병원들의 약은 모두 효과가 없었고 눈물을 흘린 이유는 아파서였지 아픈 이유가 불안해서나 궁금해서는 아니었다. 내시경을 진행한 이유도 도저히 견딜 수 없을만큼 아파서라기 보다는 일에 지장이 있어서였다. 결과는 위궤양이었다. 궤양? 뭐 소화제 먹으면 되는 그런건가, 그런데 왜 안나았지 싶은 내 눈앞에 의사가 내시경 사진을 보여주었다.

공사하다가 마감을 미처 하지 못한 천장처럼 얼기설기 얽힌 핏줄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긁혀버린 위벽이 보였다.


집에 도착해서 다시 출근 준비를 하다가 그냥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형편도 안되었지만 돈아깝다고 책상에 올려두고서나 쓸법한 작은 거울이 달린 화장대를 바닥에 두고 사용했는데 그 거울에 내리비친 내 얼굴에 분칠을 하던 중이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사랑받고 행복한 기억이 많은 이들은 불행을 언제 어떻게 느낄까, 라는.사랑을 많이 받아봤기에 힘들고 불행할 때 더 기운을 차릴까 아니면 이제는 내게 줄어들어버린 그 행복과 사랑의 총량에 실망을 할까.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알 것 같다. 힘들게 살고 불행한 것이 기본인 사람은 불행을 어렵지만 반갑게 대해야 할 손님처럼 대한다. 좋지는 않지만 올것이라 생각하지만 안오기를 바라는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그러다 묵묵부답이면 정작 언제오나 늘 신경쓰이는 그런 손님 말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불행을 자주 느끼는 사람들은 스스로도 모르게 불행을 바라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조용하면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올림픽을 준비하던 러너들은 아마도 올림픽에서 달려야 할 시간과 시간의 수백 수천배를 달렸을 것이다.

그 시간들을 두고 신발의 발바닥에 돌이 끼어 달리는 것을 그만두고, 너무 덥다는 이유로 달리기를 그만둔 그 많은 국가대표들은 과연 인내심과 열의가 부족해서였을까. 멈출 때 그리고 멈추는 것을 '택하고' 나의 발바닥과 나의 힘든 몸을 돌볼 때 그들이 연약하다고 판단을 해도 될까. 삶은 꼭 무언가 꾸역꾸역 밟고 올라가서 눌러담는 인내와 고통의 평탄화 작업이어야만 할까.


삶이 무료한 사람은, 의문을 품을 것이 아니라 감사함을 품어야 한다.

무언가를 대가나 노력없이 얻었을 수록 그런 마음이 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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