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의 기념물 위를 걷다

예술가 출신 총리가 이끄는 알바니아 건축 르네상스

by 노준철

예술가 출신 총리, 도시를 바꾸기 시작하다

최근 건축 웹진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접했습니다.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에서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프로젝트가 쏟아지고 있다는 내용이었죠.

MVRDV, BIG, 스티븐 홀, 스테파노 보에리까지.

작은 발칸 국가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 자료를 찾아보다가, 한 인물에 대해 알게됐죠.

에디 라마(Edi Rama). 전직 예술가이자 알바니아 총리인

그는 티라나 시장 시절부터 도시를 자신의 캔버스로

삼았던 정치가였습니다. 공산 정권의 회색 건물들을

원색의 페인트로 칠하기 시작한 것이 2000년대

초반의 일입니다. 당시 EU 관계자들이

"유럽 기준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했지만,

"우리에겐 평생 버틸 만큼의 회색이 이미 충분하다"고

응수했다고 하죠. 기개도 넘치고, 의지를 시적으로

표현하는 기질도 가진 정치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색 도시에 희망을 칠하다

알바니아는 1991년까지 유럽에서 가장 폐쇄적인

공산 국가 중 하나였습니다. 개인 차량 소유가

금지되었고, 해외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죠.

독재자 엔베르 호자(Enver Hoxha)가 남긴 것은

국민을 위축시키기 위해 설계된 거대하고 차가운

콘크리트 광장과 건물들이었습니다. 공산 정권 붕괴 후

티라나의 인구는 10년 만에 25만에서 60만으로

폭증했고, 무허가 건축과 혼란이 뒤따랐습니다.

2000년 시장에 당선된 에디 라마는 예산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바로 '그림 그리기'로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회색 건물에 오렌지색을 칠하자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단순한 도색이 도시 분위기를, 그리고 시민들의 마음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죠. 그는 2004년

세계 최초의 '월드 메이어 상'을 수상했고,

"한 도시 전체를 바꾼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1556188601199.png 리노베이션 전의 티라나 피라미드 (출처 : Joni Baboci Linkedin)


티라나 피라미드, 역사를 지우지 않고 다시 쓰다

에디 라마의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프로젝트가

바로 MVRDV가 리뉴얼한 '티라나 피라미드'입니다.

이 건물은 1988년 독재자 호자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박물관이었죠. 공산 정권 붕괴 후 나이트클럽,

방송국, NATO 기지 등으로 바뀌다 방치되었고,

철거 논의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하지만 2015년

조사를 해보니 대다수 알바니아인들이 철거에

반대했습니다. 이 건물이 '정권에 대한 승리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죠. 젊은이들은 밤마다 경사면을

기어올라 미끄러져 내려오며 공간을 점유하고 있었죠.

MVRDV의 위니 마스는 이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건물을 허물지 않고, 계단을 설치해

시민들이 안전하게 독재자의 기념물 위를

걸어 다닐 수 있게 했습니다. 내부에는 청소년들을 위한

무료 기술 교육 공간이 들어섰고, 컬러풀한 박스들이

폐허처럼 열린 구조물을 안팎에서 '점유'하듯

배치됐습니다. 역사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이죠.


개발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최근 서울에서도 역사와 개발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 앞 세운4구역에 최대 142미터 높이의 고층 빌딩을

허용하겠다는 서울시의 결정이 그것이죠.

"시뮬레이션 해보니 압도적이지 않다",

"녹지축을 만들기 위해 용적률을 높여야 한다"는 논리가

제시되고 있지만, 프랭크 게리가 파르테논에 빗댔던

종묘 정전에서 바라볼 스카이라인이 어떻게 바뀔지에

대한 고민은 부족해 보입니다. 티라나 피라미드가

독재의 상징을 시민공간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 것은,

역사를 존중하면서 새로운 층위를 더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종묘 앞 개발 논의에서는 '경제성'과 '녹지'라는

명분 아래 600년 역사의 맥락이 뒷전으로 밀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정치 지도자가

도시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에디 라마가 증명했습니다.

문제는 그 변화가 어떤 방향을 향하느냐입니다.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과,

과거를 지우고 치적을 세우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요.



1. 세계적 건축가들이 주목하는 알바니아 건축 붐


2. MVRDV의 티라나 피라미드 리노베이션 프로젝트


3. 에디 라마의 TED 강연: 페인트로 도시를 되찾다


4. 거장 알바로 시자가 포르투에 빚은 공원형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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