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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나물 Sep 08. 2022

영어만 잘하면 될 줄 알았지

 크로아티아에 오기 전까지 이 나라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바다가 예쁘고, 예능 프로그램 ‘꽃보나 누나’로 유명해져 우리나라 사람들이 몇 년 전부터 선호하는 휴양지라는 것 밖에는. 무지해서 더 자유롭게 상상했고 희망차게 떠나기로 결심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영어만 잘하면 문제없을 줄 알았다. 이십 대 초반 시절 유럽 여행을 다닐 때를 떠올려 보면 유럽인들은 영어로 유창하게 말을 걸어왔다. 서양 사람들은 역시 영어를 잘하는구나 싶었다. 특히 크로아티아는 여름이 되면 전 세계 관광객들이 오기 때문에 대부분 영어를 할 줄 안다고 들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봐도 크로아티아를 다녀간 사람들 중 말이 안 통해서 불편하다고 한 사람은 없었다. 일주일 동안 유명 관광지만 돌아본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이민과 관광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관광객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무지하고 무심한 태도로 크로아티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내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동네에 새 집을 구했다. 집 근처 중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우리가 이 동네의 유일한 동양인이다. 유모차에서 울던 아이도 우리를 보면 울음을 멈춘다. 대여섯 살 아이들은 아빠 허벅지 뒤에 몸을 숨긴 채 고개만 내밀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마트와 식당에선 영어로 말을 건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제가 크로아티아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크로아티아어를 잘 못해요’라고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동양인이라는 정체성은 일종의 완장이 되었다. 오른팔에 낀 투명한 완장에는 작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사람은 언제든 영어를 사용할 수 있으며, 한국말로 길거리에서 아무리 음험한 말을 해도 그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자유가 있으며, 당신의 언어를 모르더라도 이해해주십시오.’


  문제가 생겼을 때 일단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운이 좋으면 옆에 있던 사람이 통역가가 되어주거나,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들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운이 좋지 않을 땐 혼이 나기도 했다. 빵집에서 번역기 앱을 켜 빵 이름을 번역하려다 촬영하는 줄 알고 오해받아서 혼이 났고, 우체국에서 비닐봉지라는 단어를 못 알아듣는 바람에 엄청 큰 소리로 혼이 났다. 그때마다 구글 번역기 앱을 열어보지만 그 순간엔 소용이 없었다. 그저 눈치를 보며 미안하다고 한 뒤 잽싸게 그곳을 빠져나오는 수밖에.


 어떤 사람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친절을 베풀었다.


 하루는 부엌 찬장에 있던 투명한 유리 물병을 발견한 날이었다. 생화 두어 송이를 꽂아 놓고 싶어 가장 가까운 꽃집에 갔다. 때가 탄 외벽과 낡은 외관. 장사한 지 적어도 십 년은 넘어 보이는 꽃집이었다. 지나가던 동네 아주머니가 몸을 기울여 구경하고 있었고, 가게 안에는 적어도 50살이 넘어 보이는 여자 사장님이 있었다. 가게 문 옆에 있던 샛노란 튤립이 눈에 들어왔다. 다가오는 봄을 기다리기에 좋은 빛깔이었다. 사장님께 튤립을 가라키며 말했다.


“노란색으로 세 개 주세요. 얼마예요?(This yellow one. Three, please. How much is it?)”


 사장님은 가격을 말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얼른 지갑을 열어 지폐 몇 장을 꺼냈다. 예상보다 많은 금액을 펼쳐놓고 ‘어차피 말해도 못 알아들으니 알아서 가져가시면 된다’는 마음으로 멀뚱멀뚱 사장님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같은 말을 두어 번 반복하다가 갑자기 오른손을 들었다. 검지 손가락부터 하나씩 펴면서 천천히 말했다.


“Jedan(1), dva(2), tri(3)”

“오케이, 오케이.”


 알았다고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이며 30쿠나를 건넸다. 그녀는 자신의 방법이 통해서 기뻤는지 함께 웃었다. 그녀는 곧장 연노랑 종이를 작업대에 깔고 꽃다발을 만들 준비를 했다. 집에 둘 거라 튤립 세 송이면 되는데. 그냥 가져가겠다는 말을 할 줄 몰라서 잠자코 기다렸다. 여느 유럽의 꽃집처럼 그녀는 느린 속도로 자그마한 꽃들과 풀을 덧대었다. 몇 분 뒤 완성된 꽃다발은 입학식 날 가져가도 될 만큼 풍성해져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노란 꽃다발을 품에 안고 방금 전 장면을 떠올렸다. 말없이 내 손에 들려있던 지폐를 바로 가져가도 됐을 텐데. '빨리빨리'의 피가 흐르는 나는 무심코 그 편이 더 편리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녀는 눈앞의 돈을 놔두고 낯선 외국인의 눈높이로 성큼 내려와 주었다. 막 걸음마를 뗀 아기에게 알려주듯 손가락을 펼치며 하나 둘 셋을 세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왈츠가 흐르듯 박자에 맞추어 발을 떼었다.


 한국에서 30년을 나고 자란 나와 크로아티아 사람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언어장벽이 존재한다. 몇 명은 친절과 배려로 중무장한 채 그 벽을 넘어왔다. 본인들은 넘어왔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몸에 베인 습관이었을 테지만.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맙습니다'밖에 없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오늘 하루는 어떤지, 이 동네에서 자주 가는 식당은 어디인지 묻지 못한다. 내 자리에서 어디로도 넘어가지 못한 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다. 벽을 넘으면 어떤 세계가 있을지 궁금해졌다. 크로아티아어에 대해 배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안일한 태도가 부끄러워졌다. 매일 차고 다니던 완장은 잠시 주머니 깊은 곳에 넣어두었다. 며칠 뒤, 크로아티아어 수업 초급반에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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