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이라 낮 12시에 기차를 탔다. 역에 좀 일찍 도착했기에 개찰하자마자 기차에 올라서 자리를 잡고 원고를 보면서 강의 준비를 하며 기다렸다. 앞자리에 두 승객이 대화를 나누기에 아는 사이인가보다 했는데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앞자리 통로석 할아버지가 차창쪽 옷걸이에 양복 상의를 걸려니까 창가석 젊은이가 옷을 걸지 말라고 한 것이다.
"양복 구겨지니까 옷 좀 겁시다."
"여기 걸지 마세요. 제 팔에 걸리적거리잖아요."
"아니 그럼 옷 이거 어떻게 해요."
"위에 선반에 올리시든지요."
"주머니에 있는 거 올리고 내리다가 떨어질 수도 있고 한데 선반에 어떻게 올려요. 옷걸이에 좀 겁시다."
"싫어요. 제 팔에 닿잖아요!"
세상에. 기가 막혀서! 이 대화가 어떻게 끝나려나? 내 일은 미뤄두고 점점 빠져들었다.
"아니 저기 옷걸라고 옷걸이가 있는데 왜 못 걸게 하는 거요?"
"제 팔에 걸리잖아요!"
"아니 안쪽에 앉으면 그런 거 감안하고 차표를 끊는 거 아니요."
"그럼 안쪽 자리 끊으시든가요."
"표가 없어서 그런 거 아니요. 그래서 내가 처음에 서울까지 가는데 혹시 중간에 내리실 거면 자리 좀 바꿀 수 있냐고 물어본 거 아니요. 늙은 사람이 그래도 부탁하는 입장이라 예의 갖춰서 물어본 거고 옷도 좀 걸어도 되냐고 이렇게 부탁하는데 나이도 젊은 사람이 그렇게 성질 내듯이 말하면 안 되지 않소."
"내가 싫다고요. 내한테 말 걸지 마세요."
아까 타자마자 나눴던 대화는 자리 좀 바꾸자는 대화였나보다. 멀리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 쫌 그만 하소."
"조용히 좀 합시다."
젊은이한테 하는 말인지 할아버지한테 하는 말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도 못 본 척할 수가 없어서 거들기로 했다.
보던 걸 대충 정리해놓고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옆자리 사람이 들으라고 크게
"할아버지, 저렇게 싫다는데 옷 걸지 마세요. 대신 나중에 저 사람이 내릴 때 할아버지 몸에 옷자락 하나 못 스치게 하세요. 컵받이도 접어주지 말고 다리도 비켜주지 마세요. 어떻게 내리는가 한 번 봅시다."
심장 근처의 살을 1파운드 도려 가되,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이야기를 살짝 따라했다. 통로로 나가는 건 자유지만 내 몸에 닿지 말라. 옆 사람이 "넌 뭐야"하면서 쳐다보길래 같이 쳐다봤더니 헤드폰을 주섬주섬 꺼내 끼고는 눈 감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할아버지는 "거 봐요. 젊은 사람이 너무 그렇게 야박하게 하니까 저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요. 내가 암 판정 받아서 아산 병원에 검진하러 가는데 기분도 뒤숭숭하구만..."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마지막까지 예의바른 할아버지였다.
이야기의 결말이 너무 궁금했지만 앞자리 젊은이는 나보다 멀리 가는지 내가 내릴 때에도 여전히 고개를 창에 기대 눈을 감고만 있었다. 할아버지 무사한 여행길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