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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잊지 못할 졸업식

by zipnumsa


졸업식이 다가오는 2월 어느 날. 무슨 이야기 끝에 정은이와 현진이에게 말했다.

“이제 졸업이니 물질적인 무언가를 준비하세요.”

정은이가 말했다.

“이제 본색을 드러내시는구만. 맨날 뇌물이라고 안 받는다고 하더니.”

내가 받아쳤다.

“물질이라고 하면 ‘돈’밖에 못 떠올리는 이 자본주의의 노예야.”

내가 말한 것은 편지였다. 2월이라고 국어 수업 들어가는 반마다 마지막 시간에 편지를 써서 나눠주고 답장을 쓰라고 하였다. 우리 반에는 물론 평소에도 자주 편지를 써 준다. 하진이 말에 따르면 11통이라고 한다. 우리 반에서 편지를 줄 때에도 답장을 쓰라고 한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답장이 아닌 편지를 써 준 아이는 서윤이 뿐이었다. 2월에 반마다 편지를 써준다는 소문을 듣고 현지가

“다른 반인데 편지를 뭐 이렇게 길게 써 줘요? 우리 반은 왜 안 써 줘요? 우리 반은 더 길게 써 주세요.”

했을 때 물론 써 줄 예정이었지만 내가

“야, 선톡 받으면 좋지? 그런데 넌 뭐 나한테 선편지 한 번이라도 해 봤나? 그래 놓고 또 편지를 기대해?”

라고 놀린 것도 그동안의 서운함을 조금 드러낸 표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편지는 내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말 안 하면 결국 또 남는 건 답장밖에 없을 것 같아서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 정은이에게 ‘물질적’ 어쩌고 말한 것이다.

어제가 졸업식이었다. 나는 졸업식이니까 늦게 가도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출근 시간에 겨우 맞춰서 나왔다. 일찍 나오면 버스를 타고 늦게 나오면 택시를 타는 것은 2월에도 여전히 반복되는 일이다. 버스를 타면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고 택시를 타면 학교 후문으로 들어간다. 학교는 가까워서 금방 택시에서 내렸다. 허겁지겁 교문으로 들어가는데 1층 유리문 너머로 우리반 현준이와 눈이 마주쳤다. 거기서 뭐하나, 하고 자세히 보니 우리 반 아이들 몇 명이 더 보였고, 아이들은 몹시 당황한 것 같았다.

아이들을 지나쳐 교무실로 올라가는데 서윤이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선생님, 왜 뒷문으로 와요! 교무실로 가지 말고 빨리 정문으로 가요.”

“무슨 일인데 그래? 가방만 교무실에 좀 놔두고 가자.”

교무실에 가방을 놔두고 정문으로 가는데 아이들이 정문부터 학교 건물까지 띄엄띄엄 간격을 벌리고 서 있었다. 손에는 큰 종이를 한 장씩 들고서.

교문으로 가니까 수빈이가 휴대폰카메라를 켜고는 말했다.

“선생님 이제 막 도착한 것처럼 들어오세요.”

정문 바로 옆에 유진이가 서 있다가 꽃을 주었다. 그 뒤에는 솔이가, 그 뒤에는 종우가… 아이들은 정문에서 1층, 2층, 3층 계단을 지나 우리 반앞에까지 서 있었다. 손에 든 종이에는 차례로,

‘중수쌤’

‘많이 놀라셨죠?’

‘우리 돈 썼다고’

‘혼내시면’

‘앙대용♡♡’

‘쌤한테’

‘감사한게 많아서’

‘졸업을 기념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벤트 한 번’

‘준비 해봤어요’

‘기뻐해 주실 거죠?’

‘이쁘게 봐주세용~♡’

‘저희가 이 학교를’

‘떠나고 난 후에’

‘선생님이’

‘또 다른 반을’

‘만나더라도’

‘항상 저희를’

‘기억해 주세요’

‘비록 저희 33명이’

‘다른 학교에 있더라도’

‘삼학년 7반을 잊지 않겠습니다’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ㅠㅠ’

‘다시 만나기 위한’

‘약속일 거예요’

‘그동안 감사했고’

‘사랑합니다’

교실 문에는 이런 종이가 붙어 있었다.

‘약속 꼭 지킬게요’

고맙고 기쁨보다 놀랍고 당황하고 무거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아이들의 이런 이벤트에 영영 보답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만큼 나에게 과분한 느낌이 들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닥에 풍선을 붙여 길을 만들었고, 길 끝에는 불을 붙인 케이크가 있었다. 아이들이 모두 ‘사랑해요’라고 외쳤다.

촛불을 불어서 끄고 나니 정은이가 물었다.

“이제 만족하세요?”

아······. 그럼, 만족하지. 만족이 다가 아니라 몸둘 바를 모르겠다. 떨리는 마음으로 케이크를 들고 교무실로 내려왔다. 옆자리 선생님들이 다가와서 물었다.

“쌤, 애들 봤어요?”

“애들 뭐한 거예요?”

“아, 네 뭐 애들이 졸업이라 이벤트 한다고······.”

“아이들이 아까 20분 전부터 추운 밖에서 선생님 기다렸어요. 추위에 떨면서 교복만 입고 외투도 없이.”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의 ‘물질적 이벤트’라는 한 마디가 이렇게 크게 돌아올 줄이야. 이 고마움은 평생 말해도 닳아 없어지지 않을 고마움이다. 내가 복 받은 학급을 맡았다는 생각으로 지난 1년을 보냈는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잊지 못할 졸업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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