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정가표 인간

by zipnumsa


 연수원에서 국어 선생님들에게 ‘문법교육과 토의토론’에 대해서 두 시간 동안 강의해 달라고 하였다. 지난 십 년간 문법 교육에 대해서 고민해왔던 결과들을 말로 풀어나갔는데, 아예 흥미를 잃은 분들도 몇 분 보였지만 대체로 반응이 좋았다. 한 시간 마치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 앞자리의 고상하게 보이는 선생님 한 분이 작은 소리로 물으셨다.

 “선생님, 명함 있습니까?”

 “아니요.”

 “왜 명함이 없어요?”

 “네?”

 아마 나중에 무언가를 부탁하기 위해 연락처를 알고 싶으신가보다 하는데 갑자기 그 분이 팜플렛을 주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팜플렛에는 무슨 작은 문화제와 공연 일정이 적혀 있었다.

 “이거 하나 드릴게요.”

 “아, 이런 모임을 하시는군요?”

 “네, 혹시 들어보셨어요?”

 “아니요.”

 “제가 거기 회장이에요.”

 팜플렛에는 아닌 게 아니라 회장 ㅇㅇㅇ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뭐라고 대꾸해야할지 몰라서 그냥 팜플렛을 열심히 보는 척했다. 그 선생님이 메모지를 주면서 말했다.

 “명함 없으면 전화번호라도 하나 적어 주세요.”

 왜 명함이 없냐는 질문과, 자신이 어떤 모임의 회장임을 알려주는 말을 듣고 나는 미묘한 느낌을 받았다. 딱히 뭐라 말로 표현하려니 정확하게 이름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마침 쉬는 시간도 끝났기에 나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요새 이태준의 <문장강화>를 다시 읽고 있다. 오늘도 집에 돌아와서 남은 부분을 읽었는데 최재서의 <정가표 인간>이라는 수필이 인용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내용인즉,

 “시골에서 갓 올라온 얼치기가 날씨가 추우니까 백화점 양복부에 가서 외투를 입고 의기양양하여 나온다. 뒷잔등엔 25.00엔의 정가표를 붙이고. (중략) ‘그 사람 무엇 하는 사람인가?’ ‘아 그 유명한 소설가를 몰라, xxx를 쓴?’ ‘응 그래! 그런데 어딜 다니노?’ ‘xx학교 영어선생이지.’ ‘옳지!’ 이제야 비로소 알겠다는 듯이 수긍한다. (중략) 진실한 의미에 있어 개성의 소유자라면 우리는 그에게 어떠한 레테르[딱지]를 붙여야 옳을까. 오직 ‘위대한 예술가’라는 레테르가 있을 뿐이다. (중략) 편집자의 명부에서 분류된 레테르를 붙이고 득의만면하여 횡행하는 친구들은 25.00엔의 딱지를 붙이고 다니는 시골뜨기와 마찬가지로 정가표 인간이다.”

 정.가.표.인.간. ‘레디메이드 인생’만큼이나 예리한, 재치있는 표현이다.

 어딜 가든, 강의를 하면 먼저 강사를 소개한다. 밤샘독서캠프에 배유안 작가님이 오셨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나도 오늘 강의 시작 전에 소개를 받았다. 그런데 사회자가 이름만 소개하고 “나머지는 강사님 입으로 직접 듣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나에게 마이크를 넘겨주었다. 나를 소개하는 말을 내가 직접 고를 수 있게 해준 사회자가 현명하게 느껴지고 고마웠다. “하단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김중수입니다.”로 소개를 끝냈다. 내가 부산대, 부산교대, 학부와 부경대 대학원에서 무슨 과목 무슨 과목 가르친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내가 어떤 강사인지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강의를 통해 알게 되고 판단하게 될 것이다.

 물론 나한테도 영선중에서 만들어 준 명함과 국어교사모임에서 만들어 준 명함이 있다. 하지만 내가 그걸 쓰지 않는 것은 <정가표 인간>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명함에 “대한민국 김관식”만 적어 다닌 김관식 시인만큼 당당하지는 못하지만, 그리고 인용한 수필에서처럼 ‘위대한 예술가’의 레테르를 받지는 못하겠지만, 나라는 인간 대신 내 명함이 나의 행세를 하고 다니는 꼴은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결국 쉬는 시간에 내가 느낀 것은 나에게 붙는 라벨(레테르)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또한 ‘규정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지금은 또 다른 느낌들이 스친다. 내가 이름을 붙이지 못한 미묘한 느낌에다가 예리하고 재치있는 레테르를 붙인 최재서의 안목과 표현력에 대한 경탄과 부러움. 그리고 일부러 정가표를 달고 나와서 시대에 대한 풍자와 저항을 패션으로 승화시킨 ‘서태지와 아이들’을 보면 최재서는 또 무어라고 글을 쓸까? 하는 궁금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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