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어교사모임 회지읽기소모임
2023년 3월 23일 오후 1:11 에 회지 읽기 소모임에 올린 글이다.
(1)
36쪽에서 인터뷰 시작할 때 인터뷰이는 2가지 의문으로 시작한다.
1. ‘소설 수업’을 시작하면 10분도 되지 않아 책상 위에 엎어지는 아이들
2. 소설 수업은 어렵고 막막하기만 하다.
이 글을 읽으며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읽었다.
50쪽에서 인터뷰이가 찾은 답은 2가지이다.
1. 아이들이 소설을 싫어할까봐 지레 겁부터 먹은 것은 아닐까?
2. 막막함이 찾아올 때 막막함을 오래 간직하자.
2는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은 의문과 그 답이 일치하지 않는다. 인터뷰이의 진심을 알고 싶다. 지레 겁먹은 게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 10분 뒤에 아이들이 엎어지는 걸 경험했는데, 50쪽의 답으로 정말로 만족하시는 걸까?
(2) 소설 수업의 지향
진웅용(36-37) 선생님이 “손으로 탄원서를 쓰는 느낌, 은근한 단맛”을 지향하고 “좋아요 누르기, 설탕의 강한 단맛”을 지양한다고 했는데, 소설 수업에서 무엇을 지향하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아이들은 알아들을까?
박혜숙(37) 선생님이 “고민을 소설로 써 보게”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소설 수업’ 일반론은 아니고 ‘소설 쓰기’ 수업에만 해당하는 것 같다. 그 뒤에 “작품 속 인물에 대한 상담”을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상담인가, ‘수업’인가? 수업을 위해 소설을 읽고 쓰는지, 상담을 위해 읽고 쓰는지, 이어지는 인터뷰를 읽으며 계속 드는 의문이다. ‘소설 읽히기’와 ‘국어 수업’의 접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궁금한다.
소설의 힘은 “자신을 드러내는 징검다리 역할. 소설의 주인공은 고뇌와 좌절을 보여준다.”라고 하셨는데, 이걸 보여주면 어떻게 되는가? 이걸 안 보여주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그리고 “왜 소설만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인지 설명이 부족하다. ‘소설’ 자리에 국어의 다른 영역을 끼워 넣어도 다 성립하지 않는가?
비문학독해만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다.
작문만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다.
화법만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다.
문법만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다.(문법은 좀 심하네. 인정)
중요한 것은 국어 시간에 어떤 영역을 수업하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지, 그 답이 꼭 “소설”은 아니라고 생각이 드는 답변이다.
송수진(37) 선생님은 소설 수업이 “타인 이해하는 과정, 자신이 가야 하는 방향을 생각”이라고 했는데, 타인 이해, 자신이 가는 방향 생각이 ‘수업의 목표’라면, 이것이 ‘국어’ 수업이라 할 수 있나? 오히려, 윤리, 도덕, 사회 수업의 목표여야 하지 않나?
이민수(38) 소설을 읽으면 “그의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그를 변호”한다고 했는데 등장인물 누구든 변호 가능한가? 치숙이나 꺼삐딴 리도 가능한가?
(3) 소설과 가까워지려면
박혜숙(38) 선생님은, “모르는 단어를 찾고 이해가 안 되는 문장을 설명하며 한 쪽을 같이 읽고 앞으로도 이렇게 해 보자. 긴 호흡의 소설은 온전히 빠져 읽을 시간을 확보. 직접 낭독한 음성을 들려주거나 학생이 낭독한 걸 들려주기. 여성 인권, 성적 소수자를 회피할 때 야단치지 말기” 등을 제안했는데, 모두 동의하고 공감한다.
진웅용(39) 선생님은 “고전수업은 단편 소설 위주로, 일반 국어 수업은 장편의 전문을 읽게 하고 교과서에 수록되지 않은 부분 시험 출제. 이야기 나눌 만한 부분을 인쇄하거나 PDF 떠서 같이 읽어 나감.” 등을 제안했는데 이것도 모두 동의하고 공감한다.
이민수(39) 선생님은 “읽는 시간을 확보해 주기, 질문하거나 조언해 주기” 등을 제안했는데 이것도 모두 동의하고 공감한다.
송수진(39) 선생님은 “소설을 나눠서 낭독하게 하고 간단한 글을 써서 생각을 정리하고 10-15분 정도씩 읽고 짧게라도 기록” 등도 모두 동의하고 공감한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소설과 가까워지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얼 위해 이렇게 읽어야 하나? 읽기 자체가 목적인가? 읽은 후의 활동을 하기 위해서인가?” 이것을 모르겠다. 위의 (2)의 답으로 충분하지 않은 듯하다.
(4) 소설 읽힐 때 활동
독서 일지 질문 만들기 생각 정리 학습지 책 대화하기 수업 등 모두 좋아 보인다.
다만, “책 대화하기 수업”은 이제 ‘대화를 잘 하고 있군’,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놀라운 이야기가 오고가는군’을 넘어서서 ‘비평이론’을 활용하여 책을 해석하고 친구의 해석과 비교하는 ‘학습 내용’을 채워야할 때가 아닌지?
송수진(48) 선생님이 “책 읽고 대화하면 소설 읽는 것을 학생들이 재미있어 한다.”라고 했는데, 교사라면, 재미있기/고급독자 되기 중에 골라야 하는 것 아닌지? 목적 없는 이야기 나눔 그 자체는 학습을 ‘운에 맡기는’ 태도가 아닐까? 책 대화 수업의 학습 목표/내용은 다음 중 무엇인가? ** 부분에 넣을 구체적인 능력을 묘사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
a. 책 대화를 하며 **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된다.
b. 책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5) 좋은 소설 고르는 기준이나 방법
“짧아야 한다. 교사가 좋았던 작품, 갈등 상황을 공감하며 받아들이는 작품, 혼자 읽어도 이해가 되는 작품 피하기, 성장소설, 가능하면 최근 작품들, 교사가 사랑하는 책,...”
이 기준들은, “책을 고르는 기준”인가, “소설을 고르는 기준”인가? 특히 이민수 샘의 추천 책을 보면 이것이 ‘책 읽기 수업’인가, ‘소설 수업’인가 구별이 안 된다. 이민수(47) 샘의 <라미>의 책도 ‘소설’이 아니다. 박혜숙(47) 샘의 <이지영>의 책도 소설이 아니다. 감동적인 평론집을 읽는다면 소설을 읽는 것에 비해 효과가 다를까? 인터뷰의 초점이 “소설”로 좁혀지지 않는 듯하고, “독서” 일반으로 퍼지는 듯하다.
(6) 자유로운 감상과 획일적 평가 사이의 모순 속에서
수업에서 “다양한 감상과 의견이 다 맞을 수 있다”라고 해 놓고 “최근 작품을 하나의 해석으로 정리해 주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시험에서 “답은 정해져 있는 거냐”라는 항의를 받는 상황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출제의 기술”에 대한 잘못이 원인인 것 같고, 이 원인 분석이 달라지니 그 답도, “좋은 선다형을 내자”가 아니라 “선다형을 지양하자”로 이어지는 것 같다. 내 생각에는 감상과 의견이 문제의 선지로 나오면 안 되고, 감상과 의견에 따르는 ‘비평 이론’이나 ‘작품 내적 외적 근거’가 문제로 나와야지 않을까? 그러면 위와 같은 항의가 없을 듯하다. 오지선다형보다는 “작가의 주제와 학생들의 주제가 다르면, 아이들의 감상을 인정해 주는 쪽으로 평가를 유연하게” 하며 구술평가나 서술형, 논술형으로 나아간다 하더라도, 구술이나 서술은 답이 없나? 어차피 그것도 기준에 따라 답은 매겨야 할 텐데,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인터뷰에 나오지 않는다. “학생의 감상을 인정해 준다”라고 하기 전에 먼저 ‘감상의 기술’을 가르쳐야 하지 않나? 반복, 서사의 압축, 문체, 시점, 상징, 반어, 역설, 풍자, <획일적>인 분석을 지양하고 <자유로운> 감상을 지향하는 것은 좋은데, <자유> 안에 최소한의 규칙도 없다면 학생들이 실력이 늘지 않을 것이다. <획일적> 감상 안에도 근거는 있을 것이다. 그 근거의 적합성을 따지는 수업과 평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특히, 아이들의 감상이 예상과 다를 때 박혜숙(46) 선생님이 “작품에서 과학고 아이들이 느낀 점을 부정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알도록 가르치는 것”은 앞서 말한 ‘획일적 감상’의 문제가 없는가?
(7) 다시, 막막함 앞에서
박혜숙(47) 선생님은 “연주자는 연습한다. 곡에 대한 자신의 해석 필요.”라고 말했는데, 연습할 때, 무엇을 기반으로 연습하나? 처음부터 자신만의 해석이 가능할까? 처음에는 기본기를 닦는 과정을 아이들에게 겪게 할 필요는 없나? 소설 읽기의 기본기를 연습하는 것은 무작정 읽고 질문을 만들며 대화하는 것일까?
박혜숙(47) 선생님의 “새 학년을 맞아 새롭게 만난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좋아하는 소설 한 편을 내민다.” 이것이 소설 수업의 막막함을 해소하는 길을 묻는 교사에게 답이 될 수 있을까? 진웅용(48) 선생님의 “꾸준히 막막하셔라. 소설을 읽다 보면 고민이 잊힌다.” 이것이 소설 수업의 막막함을 해소하는 길을 묻는 교사에게 답이 될 수 있을까? 이민수(49) 선생님의 “좋아하는 소설 한 편만 있어도 힘이 난다. 아이들과 함께 읽고 싶다. 읽고 있는 뒤통수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이것이 소설 수업의 막막함을 해소하는 길을 묻는 교사에게 답이 될 수 있을까?
송수진(48) 선생님의 “책을 마음껏 고를 수 있고 읽을 시간만 충분히 준다. 짧은 소설부터 아이들과 천천히 읽어 나가기” 이런 답은 도움이 될 듯하다.
마지막까지도 이 훌륭한 분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시너지가 없다. 구자행 선생님 인터뷰처럼 한 명을 진득하게 파는 것도 좋았을 듯하다. 모여서 이야기하면 한 사람의 의견에 대해 맞장구나 반대의견, 보충의견 등이 나와야 도움이 되는데, 개개인의 의견이 짧게 나열만 되어 있어 ‘책 대화를 통해 의미가 깊어지는’ 그러한 기대가 이 인터뷰에서는 ‘소설 수업에 대한 대화를 통해 의미가 깊어지는’ 느낌을 받지 못하였다.
이는 구자행 선생님의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왜 인터뷰이들은 인터뷰어를 절대시하고 참회록을 쓰는가? 인터뷰하면서 토론하고 캐묻지 않는가? 인터뷰어도 잘하는 수업과 못하는 수업이 있을 텐데. 구자행 샘이 문법을 가르친다면? 비문학독해를 가르친다면? 다른 영역과의 균형에 대해 질문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함께 여는 국어 교육의 인터뷰가 다음 호부터는 “받아쓰기”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 제3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 인터뷰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