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 생활의 전성기는 대학 4학년 때였다. 피카소가 우울한 청색 시대를 지나 장미 시대를 맞이했듯, 내게도 봄날이 왔다! 하숙과 선배와의 동거 이후 학교에서 몇 정거장 거리를 두고 살았다. 졸업반을 앞두고 취업 준비에 올인하려면 통학 시간을 줄여야 했다. 마침 룸메이트를 구하던 대학 동기를 만나 다시 학교 앞으로 옮겼다.
동기는 매사에 똑 부러졌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내 빅 데이터가 같이 살 수 있다고 판단했고, 그 생각은 맞았다. 중학생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해 온 그녀는 자취 만렙이었다. 집안일을 야무지게 하는 데다 아침을 거르지 않았고, 제철과일도 잘 챙겨 먹었다. 집에 오면 가라앉던 나와 달리 활기찬 템포를 유지했다.
활달한 사람이 좋았다. 햇빛에 광합성을 하는 식물처럼 곁에 머무르면 그 기운이 내게도 전해질 거라고, 그렇게 여겼다. 함께 지내며 물드는 것. 그 경험을 두 번째이자 마지막 룸메와 했다.
그 옥탑방은 번화가의 곱창집 건물에 있었다. 탑층에서 샌드위치 패널로 연장한 구조. 한 층은 건물주가 썼고 나머지는 모두 원룸이었다. 주인 할아버지는 매월 납입일이 되면 직접 찾아와 알렸다. 정말 성가셨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날짜를 지키지 않는 세입자가 있었다고. 신뢰가 쌓이자 '자네들은 신용이 확실하다'며 추켜세웠다. 그렇게 우리는 타칭 '똑순이'가 되었다.
드라마에 옥탑방이 나오면 꼭 바비큐 파티를 하던데. 그 흔한 클리셰도 현실에선 이뤄지지 못했다. 여유 공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옥상엔 방이 하나 더 있었다. 옆 방 사람이 출입하려면 우리 베란다 앞을 지나쳐야 했다. 정말 이상한 구조인데 주인에겐 경제적으로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공간은 돈이된다. 잉여 공간을 방치하는 건 곧 낭비다.주인은 옥상의 남은 자리를 화분으로 채우며 빈 틈 없이 알뜰하게 활용했다. 꽃이가득한 그곳에 낭만이 꽃필 틈은 없었다. 어떤 낭만은값이 비싸다.
그런다고 질 순 없었다! 똑순이들은 제 몫의 낭만을 스스로 찾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친구를 초대해 부추해물전을 부쳤다. 참가비는 막걸리와 설거지.빗소리를 들으며먹고 마시는 술자리는 나름 운치 있었다. 낭만이 별 건가. 젊음과 시간은 낭만의 좋은 재료다.
비 오는 날엔 역시 파전에 막걸리
그뿐인가. 우리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김태리 못지않게 잘해 먹고살았다. 나는 근처 시장에서 방울토마토나 딸기를 샀고 똑순이는 자몽을 한 상자씩 주문했다. 자취 경력 5년 차였지만 과일을 따로 사 먹어 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단호박 수프도 똑순이 어깨너머로 배웠다. 찐 단호박을 우유와 함께 믹서기로 간 다음 냄비에 끓이면 고소한 냄새가 집 안에 가득했다. 그런데 믹서기를 쓰다니? 만렙 자취생의 주방 살림은 경이로웠다. 그녀는 사과청도 곧잘 담갔다. 3분 카레와 참치, 김치, 계란, 김. 이 다섯 가지로만 집밥을 해결하던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다채로운 식생활, 정돈된 주변 환경, 자신을 정성스럽게 돌보는 삶의 태도. 친구는 말없이도 참 많은 걸 가르쳐 주었다.
취업 준비생과 고시생. 심리적 압박감과 피로가 쌓여갔다.동고동락하는 사이에만 보이는 게 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왔네" "스트레스 많이 받았어? 안 하던 잠꼬대를 다 하고" 별 말 아닌데도 내 힘겨움을 누군가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고향의 부모님보다 룸메이트가 더 가깝게 느껴진 시절이다.
글을 쓰며 이제야 돌아본다. 친구가 속상해서 몸져누웠을 때 난 뭘 해줬지. 어쭙잖은 위로를 건네면 더 속상할까 봐 그저 곁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 시절을 회상하면 친구는 꼭 이렇게 운을 뗀다. "그래! 그때 우리 둘 다 찌들어서.. 예민했고.. 진짜 힘들었잖아!" 프로예민러라 미안할 뿐이다.
옥탑방 생활을 얘기할 때 빼놓지 않는 에피소드가 있다. 딸기와 옆집 민폐남매, 속옷 분실 사건.
낭창하게 드러누워 숨만 쉬던 주말 오후. 똑순이가 뜬금없이 딸기 타령을 했다. "갑자기 웬 딸기?" "저기 화분에 열린 딸기, 되게 탐스럽다." 열린 창 너머, 잎 사이로 딸기가 보였다. 어쩜 딱 한 송이가 적당한 크기와 빛깔로 먹기 좋게 열려 있었다. 몰래 따 먹을까 말까 하다가 양심을 지켜낸 기억. 잘 익은 딸기를 보면 그때 생각이 난다.
누웠을 때야 보이던, 새빨간 딸기 한 송이
옆집 사람은 남동생과 같이 살았다. 그는 아침 7시마다 알람처럼 화장실에서 기침하며 가래침을 뱉었다. 벽체가 샌드위치 패널이라 방음이 안 됐다. 정확한 시간에 매일 산책하던 칸트처럼 '쿨럭쿨럭 캭 퉤!' 소리에 눈을 뜨면 어김없이 7시였다. 옆집 칸트 덕분에 늦잠 잘 일은 없었다.
동생이 기침하는 칸트라면 누나는 자린고비 직장인이었다. 옥탑방은 여름에 덥고 겨울엔 춥다. 주인은 전기세는 각 방마다, 난방비는 옆집과 절반씩 부담시켰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보일러 스위치가 바깥에 있었는데 옆집 여자는 새벽에 출근하면서 전원을 끄고 나갔다. 더 늦게 일어나는 우리는 아침마다 추위에 떨며 일어나야 했다. 취약한 방음과 요금 구조 때문에 이웃에게 악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집이 더 좋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문제다.
속옷 도난 사건은 두 번째로 겪는 일이었다. 하숙할 때 속옷을 한 번 도난당한 적 있다. 1탄은 장르가 호러였고 2탄은 미스터리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속옷 하나가 안 보였다. 친구는 열심히 추리했다. '옆집과 세탁기를 같이 쓰고 있으니 세탁기에 남겨진 걸 옆집이 모르고 가져갔나 보다.' 그런데 말입니다!그 추리엔 의문점이 있다. 그 속옷은 색감이 아주 화려했다. 착각하기엔 너무 눈에 띈다. 또 실수라 한들 남의 물건인데 다시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옆집에 물어보려다 귀찮아서 관뒀다. 그렇게 미제로 남았다.
다사다난한 일 년을 보내고 졸업과 동시에 옥탑방을 떠났다. 똑순이는 학교 근처에 남았고 나는 경기도 A시로 갔다. 같이 살면 사이가 틀어진다는 말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동거 전보다 더 친해진 우리는 똑순이가 새로 이사한 집을 아지트 삼아 20대 후반까지 추억을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