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소문 속, 동네의 시간이 멈춘 자리에서
아현동의 가파른 언덕길, 낡은 빌라 앞에서 한참이나 걸음을 떼지 못했다. 어쩌면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거미줄처럼 갈라진 외벽의 무늬 속에서, 나는 애써 잊고 지냈던 내 첫 반지하 방의 눅눅한 벽지를 보고야 말았으니까.
'재개발 예정'. 붉은색 스프레이로 쓰인 글씨와 펄럭이는 현수막이 동네의 멈춰버린 시간을 대변하고 있었다. 모두가 ‘미래 가치’와 ‘대지 지분’을 계산하며 떠나간 동네. 나는 그 텅 빈 공간에서,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과거의 한 페이지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1970년대에 지어졌다는 붉은 벽돌 빌라의 외벽은, 그때 내 꿈의 무게만큼이나 나를 무겁게 짓누르던 그 시절 단칸방의 벽과 꼭 닮아 있었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텅 비어 스산한 풍경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몇몇 집 창가에는 주인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닿은 화초들이 여전히 자라고 있었다. 마치 이곳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듯한 꿋꿋한 생명력. 아, 그때 깨달았다. 나는 지금 허물어질 건물을 보고 있는 게 아니구나. 40년의 세월이 새겨놓은 어떤 ‘무늬’를 보고 있구나.
저 벽돌은 누군가의 ‘첫 내 집 마련’이라는 벅찬 꿈을 지탱해주었을 테고, 저 낡은 창틀은 갓난아이가 청년으로 자라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을 것이다. 우리는 낡은 것을 너무 쉽게 ‘없어져야 할 것’으로 치부해버리곤 한다. 하지만 그날 내가 본 것은 단순히 낡고 오래된 건물이 아니었다. 갈라진 벽에 기대 울고 웃었던, 조금은 서툴고 무모했지만 세상 누구보다 뜨거웠던 과거의 내 자신이었다. 아니, 어쩌면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내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그날 수첩에 다급히 받아 적은 것은 근처 부동산의 연락처가 아니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내 자신의 이야기였다.
누군가에게는 곧 사라질 ‘구축’일 뿐인 그곳에서, 나는 돈보다 중요한 내 삶의 한 조각을 되찾았다. 돈이 되는 정보는 아니지만, 돈보다 중요한 이야기. 어쩌면 나는 앞으로도 이런 공간의 마지막 목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사람, 그런 기록자가 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