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두나 Dec 27. 2021

매각되는 회사에 다닌다는 것

남아있는 나는 루저인 걸까?

최근에 다니고 있는 회사가 사모펀드에 매각됐다. 해외에 본사가 있어서 나름 글로벌 기업에 다닌다는 자부심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내가 다니는 회사는 그냥 그런 국내의 기업이 되어버렸다. 국내 기업이라고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업계 1위도 아니고 엄청난 기술력이 있어 미래가 보장되는 회사도 아닌 상황에서 글로벌 기업이라는 타이틀마저 떼 버리면 이 회사에는 더 이상 자랑으로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회사는 독립적인 운영을 위해 고군분투를 해야만 했다. 해외 본사의 시스템에 의존하던 체계에서 독립적인 운영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팀이 만들어졌다. 지금 당장 영업은 해야 하기에 해외의 시스템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지만 그동안 우리의 고객 정보는 모두 해외 본사로 흘러들어 간다. 그리고 그렇게 빠져나간 정보는 해외 본사가 지금의 회사를 매각하면서 국내에 투자한 다른 회사(게다가 경쟁사이다)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불안감과 빠른 시일 내에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직원들 사이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경영진은 직원들에게 고용안정을 보장할 것이고 매각작업이 완료되면 우리는 더 많은 투자를 받아서 더욱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장밋빛 청사진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직원들에게 지금의 자리에서 흔들리지 말고 일해 줄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경영진의 말과 직원들의 마음은 달랐다. 안정적인 외국계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국내 사모펀드의 투자를 받은 회사가 됐다는 소식에 직원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회사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참 좋기로 인정할 만한 곳이다. 일이 잘못되거나 누군가가 실수를 해도 그 잘못을 탓하기보다는 함께 해결책을 찾아나가고 서로를 존중해주는 문화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사모펀드에 매각된 이상 새로운 오너는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서 회사를 몰아붙일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지금의 좋은 문화는 망가질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오고 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한 명씩 다른 회사를 찾아서 떠나기 시작했다. 2년 정도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 익숙해졌던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니 어쩐지 마음이 허전해졌다. 동료들이 떠나기 시작하자 나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도 다시 이직을 해야 하나? 이대로 남아있으면 능력 없는 루저가 되는 걸까?"


남아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루저가 되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 


나름 열정 있고 능력 있어 보이는 동료들이 다른 회사를 찾아서 퇴사를 하자 이대로 남아있으면 능력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게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입사할 때만 해도 최소 3년 이상 기왕이면 5년 이상 재직해서 장기근속상을 받으리라 다짐했던 곳이다. 재택근무에 유연근무제, 나에게 나름 유용한 복지에 업무강도도 아주 강하지 않은 지금까지 경험했던 회사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이다. 


"사모펀드에 매각된 회사의 말로를 겪어 본 적 있어요. 결국에 좋은 문화는 다 망가지고 회사는 단기 이익에 집착하느라 직원들을 몰아붙이기만 하더라고요. 장기적인 비전도 없고 남아있어 봤자 회사의 소모품으로밖에 취급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결국 여기도 그렇게 될 것 같아요."


나에게 전해 준 어떤 퇴사자의 이야기가 더욱 마음에 남았다. 하지만 나는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떤 미련이 남은 것일까. 좋은 동료들과 이별하는 것이 어려운 것일까, 아니면 지금의 좋은 문화를 떠나기 아쉬운 것일까.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듣자면 이런 좋은 동료나 문화들도 결국에는 사라질 것들인데...


나름 네 번의 이직을 했던 '프로 이직러'라고 자신했던 나는 이상하게도 지금의 회사를 선뜻 떠날 결심을 하기 어려웠다. 특별히 이직을 위한 활동을 하지 않은 채 시간은 흘렀고 그 와중에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좋은 일 : 해외 본사에서 성공적인(?) 매각을 위한 특별 보너스(매각 위로금)를 지급해 준 것이다. 약 3개월치 월급 정도의 금액이 통장에 찍혔다. 

좋지 않은 일 : 보너스를 받은 직원들의 퇴사가 더욱 많아졌다. 그리고 나의 직속 상사도 퇴사 소식을 전해주었다.


보너스가 지급되자 직원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우수수 나가기 시작했다. 나의 직속 상사가 퇴사하면서 본부 내에서도 업무 변화가 있었고 나는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직하지 않아도 이직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책임감이 더 크고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난이도도 더 높게 느껴지는 새로운 직무에 자리도 층을 옮겨 낯선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함께 일하는 가까운 동료들도 바뀌었다. 나름 하고 싶었던 업무였기에 어떻게 보면 좋은 기회가 될 듯싶었다. 그리고 한 동안은 새 직무에 적응하느라 바쁜 나날이 흘렀고 그 사이에 또 사람들은 퇴사하고 새로운 사람들로 자리가 채워졌다.


연말이라 그런지 연이어지던 퇴사 러시도 이제는 조금 잠잠해진 느낌이다. 보통 연말에 진행되는 평가가 끝나고 평가등급과 연봉이 정해지기 전까지는 퇴사가 줄어든다. 그리고 새로운 해의 연봉이 결정되고 회사의 경영 성과급 등이 지급된 이후 3월 정도가 되면 봄에 꽃이 피듯 사람들의 이직도 많아진다.


회사의 매각, 연말, 성과평가, 나와 함께 일하던 동료의 이직...

어떻게 진행될지 결과를 알 수 없고 내가 완전히 제어하기 어려운 이 상황들 속에서 그래도 아직은 내가 이 회사에 남아있어야 할 이유를 찾아가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육아휴직 중 이직이 염치없다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