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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소 Jul 18. 2021

그림 그리기 좋은 나이

두어 달쯤 되었을까. 정신없이 첫째의 등원 전쟁을 치르고 둘째를 태운 유모차를 밀며 집으로 돌아오던 . 여름  앞에  하늘이 파란빛으로 선명하게 눈을 히는 쨍한 볕을 쏟아내고 있었다. 좀처럼 마주하기 쉽지 않은 맑은 하늘과 좋은 볕을 두고 집으로 그냥 들어가기가 아쉬워서 둘째와 짧은 동네 산책에 나섰다.


유모차를 밀며 걸어가던 길 저 앞에서 어떤 어르신을 보았다. 성성한 백발에 작지 않은 , 단출하지만 멀끔한 차림의 어르신은 버스정류장  나무들을 둘러친 울타리 앞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위에 스케치북을 펼쳐 그림을 그리고 계셨다. 자전거를 이젤 삼아 스케치북을 펼쳐두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어르신의 모습은 평범한 동네에 갑자기 나타난 낯설고도 새로운 풍경이었다. 모두가 핸드폰을 보며 걸어가거나 정류장에 앉아 가끔씩 고개를  버스를 기다리는 그저 평범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어르신은  혼자 멈춰진 사진 같았다.


동네 한가운데 갑자기 나타난  낯설고 새로운 풍경신기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길을 지나는 모든 사람이 어르신 옆을 지날 때마다 스케치북과 어르신을 흘끔거렸고 어떤 사람은 옆에 서서 어르신의 그림을 한참 구경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의 눈빛에도 어르신은 그저 고개를 들어 나무   , 시선을 내려 스케치북   바라보며 묵묵하게 스케치를 더해가실 뿐이었다.  역시   앞에 계신 어르신을 처음 발견하고 곁을 지나쳐갈 때까지,  새롭고 낯선 풍경을 한참이바라보았다. 그림을 그리고 계신 어르신을 지나 저만큼 걸어가다가 우뚝 걸음을 멈춰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길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이 신기한  어르신을 바라보며 지나갔고 누구는 곁에 서서 기웃거리기도 하는데 어르신은 한결같이 개의치 않고 그림을 그리셨다. 갑자기 나타나 저도 모르게 스스로 설고 새로운 풍경이  어르신의 덤덤한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산책을 이어갔다.


‘멋진 할아버지시네.’


 후로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같은 곳에 나와 그림을 그리고 계신 어르신을 볼  있었다. 아침 등원 길에 어르신을  날은 아이를 하원 시키고 놀이터에서 한참 놀다 돌아오는 저녁시간까지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계셨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통행에 방해가 될까 싶으셨는지 의자 하나 두지 않고 내내 선채로. 그렇게 여러 날동안 길을 오며 가며 눈동냥으로 흘끔거린 어르신의 스케치북은 어느새 연필 스케치가 완성되고 수채화 물감으로 조금씩 색이 칠해지더니 어느덧 짙푸른 녹음으로 채워져가고 있었다. 처음엔 그릴만한 풍경이랄  없게 보이는 평범한 우리 동네  위에 갑자기 나타나 그림을 그리고 계신 어르신의 모습이 신기하고 새롭게 느껴졌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니 마치 어떤 약속을 지키듯 매일 성실하게 나와  곧은 자세와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며 자기만의 속도로 그림을 완성해가시는 모습이 져서 새롭게 느껴졌다. 어르신을 처음 봤을  느낀 새로움과는 조금 다른 새로움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시간을 채워가는 어르신이 정말 멋지고 대단해 보였다.


가끔씩 매일 평범하게 어어지는  시간들  앞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생각하곤 했었다.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어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이를 먹을수록 어제 같은 오늘을 보내고  오늘 같을 내일이 이어지는 평범한 많은 날들 속에서. 반복되는  같은 순간에도 사실은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간처럼, 성실하게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같은 시간 속에서 나는 괜찮은 어른 어느 언저리, 보통 엄마 어디쯤이라도 향해 가고 있는 건가 싶을 때가 많았다.


한때는 좋은 어른,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까마득하게만 보이던 30 중반이 부모가  지금 바람이  아름답지만 직접 그리기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보다  막연한 피사체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나는 좋은 어른, 좋은 부모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그저 하루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며 많은 책임과 좋아하는  사이의 균형의 근력을 우고 오늘의 나를 이해하고 긍정하려는 노력을 오래도록 이어가고 싶다. 그런 매일이 쌓여 나도 모르게 조금씩 만들어져   모습이 내가 꿈꿀  있는 가장 선명하고 괜찮은 미래가 아닐까 싶다.


그림을 그리기 좋은 나이는 언제일까. 나를 둘러싼 상황과 조건에 골몰해 침몰하지 않고 성실하고 연한 태도로 제 시간을 차곡히 채워 나간다면 그때가 그림을 그리기 가장 좋은 , 좋은 나이가 아닐까.  위에 세워둔 자전거를 이젤 삼아 묵묵히 그림을 그리던 어르신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좋은 어른, 좋은 부모는 아니어도  읽는 할머니, 그림 그리는 엄마, 쓰는 사람으로 사는 꿈은 오래도록 꾸고 싶다.


 같은 자리에 나와 그림을 그리던 어르신은 어느 날부터 그곳에 나오지 않으셨다. 아마 그림을  완성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르신이 어딘가에서  스케치북을 펼쳐두고 묵묵히 그림을 그리고 계실 거라 믿는다. 보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것은 확실하게 확신할  있을  같았다. 그리고 얼마 나는 동네 다른 곳에서 어르신을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화단에  작은 들을 그리고 계셨다.  모습은 내가 기대한 가장 확실한 미래였다. 이번에는 금방 그림을 완성하셨는지 며칠 만에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언젠가 다시 그림을 그리고 계신 어르신을 만난다면 그땐 시원한    건네드리고 싶다. 어르신은 아실까. 어느 더운 여름,  위에서 서서 땀을 닦아가며 묵묵히 그림을 그리던 당신의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이미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무척 인상적인 그림이 되었다는 . 어르신은 지금까지 내가  사람 중에 가장 그림 그리기 좋은 나이를 살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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