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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MA Apr 05. 2023

깜박거리는 작대기

씀으로 유혹하는 최면


뭔가를 쓰기 위해 키보드에 손을 얹는다. 어떤 날엔 단편 소설, 어떤 날은 시, 그리고 일기였다. 과제나 업무를 제외하고 며칠은 노트북을 젖히지도 않는 날도 있었지만, 목적 없이 그저 쓰기 위해 화면을 마주하고 앉은 날도 더러 있었다. 그래, 쓰자! 하고 앉아서는 주로 하는 일은 깜박이는 작대기를 바라보다 한숨 쉬는 거다. 막상 쓰자니 떠오르는 건 없고, 있어도 머릿속 찬란함이 막상 화면에 얹어지니 이건 뭐 말도 안 되는 쓰레기에 가깝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어쩌다 몇 자, 몇 줄의 글이 적히고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저장 후 창을 닫는다. 

그동안 잘 쓴다는 평가를 종종 들어왔는데 이게 내 버릇을 망쳐놓았지 싶다. 뭐라도 쓰려고 드는 태도. 매번 결심한다. 겉멋 들지 말자, 솔직하게 쓰자. 하지만, 그러면 결국 너무 우울하고 어두워지거나 이건 뭐라는 건지 이해도 하기 어려운 말들을 싸지르고야 마는 것이다.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 심지어 그걸 잘할 거라는 착각. 심지어 너무 연약해서 금방 무너지는 착각을 한 껏 곁들여 만들어낸 최면이다. 좌우로 왔다 갔다 거리는 목걸이를 보지 않고도 걸리는 최면. 깜박이는 커서에 현혹된다.  

나는 왜 써야 하는 최면에 걸릴까. 그 이유는 첫 째, 쓰는 행위에서 오는 감정의 해소에 있다. 둘째, 어쩌다 얻어걸린 날에 받는 긍정 피드백이 짜릿함에 있다. 셋째, 쓰다 보면 될 거라는 아주 달콤하고도 괴로운 유혹에 있다. 이것 봐, 또 쓰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대책 없는 해맑은 피해자. 오늘도 한참이고 커서를 바라봤다. 일정한 속도로 깜박거리는 이 작대기가 움직일수록 홀려든다. 아, 뿌듯함이라는 감정도 빼놓아선 안 되겠다. 어떻게든 이 백지를 채워냈다는 뿌듯함도 네 번째 이유가 되겠지. 

세상엔 수많은 글이 넘쳐난다. 이렇게 사세요, 아니 그렇게 살지 마세요 하는 글도 아주 많다. 저는 이랬고요 저는 요랬습니다 하는 글도 역시나 많다.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구태여 내가 보탤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결국 쓰기로 결심한 건 역시나 이 말도 안 되는 커서의 유혹 때문일 것이다. 최면에서 깨어난 훗 날의 내가 책임지겠지! 하는 대책 없는 해맑음의 면모를 다시 한번 뽐내며 이만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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