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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문수 May 31. 2022

재미와 의미

행복에 대한 관점을 이야기할 때, 누군가는 삶의 재미를 중점으로 이야기하는가 하면,


다른 누군가는 삶의 의미를 중점으로 이야기한다.


대개 사람들은 재미보다는 의미를 더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마도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삶의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들보다


더 행복할 거라는 ‘루머’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과연 전자가 후자보다 더 큰 행복을 갖고 살아가는가?




재미라는 것은 감각적이면서도 자극적이다.


즉, 우리가 재미를 느끼는 대부분의 대상은 우리의 육체적인 감각들을 동반한다.


노래를 들으면 귀가 즐겁고, 아름다운 걸 보면 눈이 즐거운 게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재미는 느끼면 느낄수록 그 정도의 수준이 더 나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떨어지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자주 먹으면 질리고, 아무리 재밌는 유머도 여러 번 들으면 짜증이 난다.


물론 예외도 없지는 않지만, 우리의 감각은 생각보다 쉽게 무뎌지기 때문에,


아직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재미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새로운 재미를 찾을 때마다, 이전에 해봤던 것들과 그 정도를 항상 비교한다.


전에 했던 것보다 재밌는 게 아니라면 관심을 가지는 일이 없다.


그렇게 재미의 신기록을 경신하면서, 재미의 기준을 높인다.


이런 이유로 재미는 자극적인 가치가 되어버린다.




의미라는 것은 정신적이면서도 중첩적이다.


재미와는 달리 사람이 의미를 구하는 일에는 굳이 감각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의미라는 가치가 따지고 보면, 인간이 사유를 통해 얻어낸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미를 구하는 방법은 당연히 ‘생각하기’가 지배적이다.


그런데 생각이라는 것은 감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구체적이기 때문에,


의미를 구하는 일이 재미를 구하는 일보다 어려울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독서를 어려워하는 이유도 나타난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많은 시각적 집중이 요구되는데,


거기에 더해 문장에 담긴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생각까지 해야 하니까.




그런데 의미는 재미와는 달리, 같은 대상에 대해 의미를 계속 헤아려 볼수록


그 정도의 수준이 떨어지지 않고 일정함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커다래진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삶의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굳이 새로운 걸 찾아 헤매지 않더라도 지루하지 않고 평온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그런 모습 때문에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금욕적이고 절제적이라고 착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의미가 재미보다는 ‘유통기한’이 길다는 사실은 틀리지 않았다.


여기서 누군가는 의미가 재미보다 우월한 가치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비유해 보자면, 재미라는 것은 즉석 음식이고, 의미라는 것은 발효 음식이다.


단지 보관기간에 차이가 있을 뿐, 어느 것이 더 건강하고 맛있는지는 미지수인 거다.




즉, 삶의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과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행복한지는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둘은 같은 대상으로부터 얻어지는 행복의 지속성에서 차이를 보일 뿐이다.


한 가지 대상에게서 더는 행복을 느낄 수 없다면, 다른 대상을 찾으면 그만이다.


세상은 무지막지하게 넓고 인간은 작은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데 즐겨듣던 노래가 인생음악이 되고, 즐겨먹던 음식이 소울푸드가 되는 것은 뭘까.


그것은 재미가 의미로 승화되는 경우가 아닐까.


아,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오면서 품은 모든 의미는 예전에는 재미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닐까.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는 것이지!




22.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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