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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문수 May 12. 2022

인간관계는 왜 어려울까

타인과의 인간관계를 결정짓는 것은 ‘’이다.


“선 넘네.”라고 말할 때 그 선 말이다.




선은 달리 말하면, 언행의 수용 정도이다.


타인의 말과 행동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를 말한다. 


우리는 이 선을 통해 누군가를 나와 인간관계를 맺기 좋은 사람인지 판가름한다.


그런데 이 선이라는 것 때문에 인간관계를 맺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인간관계는 객관적이다. 타인에 의해 확인될 수 있고, 그 형태가 일반적으로는 고정적이다.


예를 들어, 부모-자식 관계, 형제자매 관계, 부부, 친구 등 한 번 관계가 이루어지면


그것을 바꾸거나 끊어버리는 일이 드물다.


그래서 남사친이 남친이 되고 여사친이 여친이 되는 경우는 특수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선’은 주관적이다.


사람마다 본인이 생각하는 선이 다르며, 심지어는 누군가를 상대하느냐에 따라 그 선이 달라진다.


대개 사람은 권위 있는 자의 권위적인 행동은 쉽게 수긍하고,


권위 없는 자의 권위적인 행동은 쉽게 반발한다.


권위 있는 자에 대해 뒤에서는 욕을 하더라도 앞에서는 결국 굽신굽신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직장에서의 상사-부하 관계나 학교에서의 선생-제자 관계 같은 명확한 위계질서 아래에서 나타난다.


뚜렷한 위계가 없는 평범한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친절한 사람의 행동에는 너그러워지고,


무례한 사람의 행동에는 사사건건 예민해진다.




이렇듯 선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리고 누구를 상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서,


‘선과 선의 교집합’을 찾아야 바르게 맺을 수 있는 인간관계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또한, 그 ‘선’이라는 것마저도 우리가 맹신할 수는 없다. 사람은 거짓을 이용하는 동물이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언행을 ‘받아들이는 척’할 수 있다.


흔히 사소한 이유로 다투고 싶지 않다거나, 억지로라도 그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경우에 그렇다.


그 인간관계에서 오는 이득보다 손해가 더 크더라도 말이다.


이러니 우리가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이 복잡할 수밖에 없으며,


복잡한 것들에 진절머리가 나는 현대인들은 더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우려한다.


점점 인간이 아닌 반려동물과 가족이 되려는 현대인들이 늘어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관계 때문에 우리가 스트레스 받는 이유는,


관계를 맺는 상대방과의 ‘선과 선의 교집합’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어울려서는 안 되는 사람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를 맺을 때 인간은 보통 능동적인 입장이 아니라, 수동적인 입장이 된다.


현대인의 인간관계는 장소에 종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처음부터 상대방과 잘 맞아서 어울리는 게 아니라,


그저 같은 반이었기 때문에, 같은 강의를 들었기 때문에, 같은 직장에 다녔기 때문에


원치 않아도 어울리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비결이 의미 있는 대화의 총량이 아니라,


그동안 함께한 시간의 절대적인 수치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현대인은 초중고등학교를 거쳐 성인이 되고 나서 오래 알고 지냈던 사이가


거창하지 않은 이유에도 갈라지는 걸 보고 인간관계의 허무함을 느낀다.




인간관계로 스트레스 받는 다른 이유는, 그 인간관계를 유지할 능력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억지로 유지하려는 ‘인간관계호더’적인 성향 때문이다.


이건 애니멀호더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관계호더가 애니멀호더와 다른 점은 학대의 대상이 또 다른 개체가 아니라, 주체 본인이라는 점이다.


즉, 학대하는 사람도 학대받는 사람도 결국 자신이다.


이 경우는 ‘현재제일주의자’나 ‘미래부정론자’에게서 볼 수 있다.


현재제일주의자는 현재가 본인 인생에서 가장 최고의 시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말하며,


미래부정론자는 본인의 미래가 현재보다 나을 수 없다 생각하는 사람이다.


둘 다 내가 지어낸 말이니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어쨌든 이 둘이 가지는 공통점은,


그동안 맺어온 현재의 모든 인간관계를 반드시 유지해야만 한다는 강박증이 있다는 거다.


앞으로 새롭게 맺게 될 인간관계가 지금까지의 인간관계보다 결코 나을 수 없다는 착각인 셈이다.


역시나 이러한 사람들도 인간관계에서 서로가 잘 맞느냐 안 맞느냐보다


함께한 시간의 총량을 더 우선으로 한다.


그래서 그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몸부림치면서도 노예처럼 감정과 체력을 착취당한다.


그 인간관계를 끝냄으로써 앞으로 고통받지 않을 시간이 훨씬 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고통받아온 시간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본인의 행복에는 인색하고 불행에는 너그러운 현대인의 성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명백한 자기학대다. 우리는 제대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착취당하는 친구 사이는 없다. 그건 친구 사이가 아니라 주인과 노예다.




앞서 말했듯, 인간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수동적인 입장이 되기 쉬운데,


능동적인 입장이 될 수 있다면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일은 간단해진다.


그 인간관계로부터 오는 행복과 불행의 총량을 저울질해보면 더욱이 쉬운 결단을 내릴 수 있다.


다들 본인의 체력이 무한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면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우리는 보다 경제적인 투자를 해야 하지 않을까.


더 적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더 많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인간관계에.


이제는 내 행복에 너그러워지고, 불행에 인색해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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