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비효과'와 태중과 트라우마 치료
2. 사물이 비롯되는 근본이나 원인
사 년 넘게 상담을 이어오고 있다. 처음에는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도 몰랐다. 대화가 쌓이면서 그제야 반복되는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고, 더듬더듬 '나'라는 사람을 알아갈 수 있었다. 해결보다는 이유를 탐색해 나가는 과정이었기에, 끝없는 나선을 돌듯 괜찮아짐은 더 큰 추락을 동반했다.
상담이 이 년을 넘었을 무렵에는 간신히 '엄마'라는 주제를 수면 위로 떠올릴 수 있었다. 금기의 영역을 침범한 것처럼 아슬아슬하고 지난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아주 조금씩, 나와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고 뒤늦게 미워하고 용서해 갔다. 그러나 그 모든 관계에서 훨씬 자유로워졌음에도 여전히 이따금 깊은 나락에 떨어졌고, 이어지는 질문의 답은 한결같았다.
"나는 ~해야 하고, 나는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에요."
완벽해야 하고, 실수해서는 안 되며, 원만해야 하고, 거절해서는 안 되고. 남도 그래야 하느냐 하면, 아니다. 머리로는 내가 완벽하지 않고, 실수 투성이며, 그다지 착하지도 않고,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일 투성이라는 걸 안다. 나뿐 아니라 누구든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 또한 안다.
그럼에도 마음 저 깊은, 찾을 수도 없는 곳에서 끊임없이 속삭인다. 나는 사실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그 목소리 위로 아픈 사실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나는 잘 하고 있어.
그 위로 또 한 겹의 목소리-내가 가장 먼저, 또 자주 발견하는-가 말한다. 잘난 척하지 마, 하지만 잘하는 척 해, 문제 있다는 걸 들키면 안 돼.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아직 나도 제대로 모르는 내 마음을 조리 있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니까. 지난 상담 때 이런 얘기를 두서없이 뱉어내는 나를 가만히 보던 상담 선생님은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엄마 뱃속에 있을 때 근원적인 상처로 인해 트라우마가 발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영화 '나비효과' 감독판은 결말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사랑하는 여자의 행복을 위해 수없이 과거로 돌아가 인생을 고쳐나가던 주인공은, 결국 모두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을 한다. 왜 갑자기 이 오래된 영화가 생각났냐 하면, 엄마에게 들었던 탄생 비화가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도 목을 감싸는 걸 그다지 선호하지 않지만 어렸을 때는 폴라를 못 입을 정도로 질색했었다. 그런 얘기를 하던 어느 날 엄마는, 내가 태어날 때 목에 탯줄이 감겨 있었다는 얘기를 했다.
영화감독의 놀라운 상상력, 알고 보니 출생 중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 끝을 모르는 상담에 지친 마음, 어떤 결론이든 답을 내고 싶은 조급함이 뒤섞여 만들어낸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아니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되지조차 못한 각각의 상황일 뿐. 그럼에도 '애초에 가지고 태어난 트라우마'라는 허황된 생각이 어떤 위로가 됐다고 고백해야겠다. 허무하고 공허하기도 하지만, 나를 비롯해 누군가를 탓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이라고 느꼈는지도.
사람은 유전자의 운반체 즉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과학적 설명이 가능한 시대에 근원적 트라우마를 논하는 게 썩 납득 가는 일은 아니지만, 세상에는 우리의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고 지혜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게 마련이니. 이 또한 나를 좀 더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라 생각하며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놔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