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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했던 뿌리4

그리스도인을 만나다2

by 단팥빵의 소원

"나 이제부터 믿을 거야"

아버지는 식탁 위에 성경책을 딱하니 올려놓으셨다. 내가 광주에서 유학생활을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안되서였을거다. 4년의 지방대학생활을 졸업하고 조그만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모여서 답답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평범하고 바쁜 일상을 보내다 집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었다. 식사시간도 아니었고 어두운 밤도 아니었던 것 같다. 추억의 배경은 흐릿하지만 아버지의 한마디는 명확하게 기억난다. 대학교 때 친구, 사랑스러운 A양이 떠올랐다.


술자리가 잦았던 동아리에서 벗어나 기독교동아리에서 믿음을 외치던 그 아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자유로워 보였다. 사람을 의식하면서도 나에게 전도하려던 그 열정은 어디서 나왔을까, 아버지가 식탁에서 외치던 '믿음의 고백'은 어떻게 가능했지?


사람은 보통 보여야 믿는데 보이지 않음에도 왜 확신을 가지는 걸까 싶었다. 힘들다 보면 붙잡을 게 없어 나락까지 갈 때, 사람은 결국 보이지 않는 걸 붙잡을 수밖에 없는 걸까 싶었다. 그 실체가 존재하던 존재하지 않던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나약해지는 순간에 왜 아버지와 A양의 모습은 강해 보이는 걸까?


아버지는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순간부터 무던히 노력하셨다. 술의 유혹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셨다. 여전히 무너지실 때도 있었지만 이전과는 달라 보였다. 내 안에는 아버지를 향한 미움도 그대로 박혀있었지만 동시에 뭔가 싹트고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20대 중반의 나이였다. 내 마음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씨앗이 심기고 발걸음은 집 근처 한 대형교회로 향했다.


어떤 용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사람 많은 곳은 질색하면서도 너무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향했던 것 같다. 인생의 보물을 찾을 것 같다는 예감으로 혼자 용감하게 갔다. 2013년의 봄 정도였을 거다. 대예배를 듣고 청년부를 등록하고 동갑의 셀리더가 있는 팀으로 배정받았다. 처음에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대예배말씀도 소모임에서도 적극적이기보다 조용조용하게 다녔다. 셀리더의 질문에 가끔 한두 마디 짧게 답하는 정도의 셀원이었다.


버거킹에서 한창 알바를 하던 때였나, 본격적인 직장생활을 하기 전 용돈벌이로 일상을 버티던 때였다. 매주 참석하는 개근은 아니더라도 간간히 얼굴 비치며 소심한 존재감을 보였을 거다. 소소하게 일상에서 버거킹에서 사이 안 좋던 오빠를 위해 근무 전 기도하는 시간도 가져본다. 생각해 보면 아직 믿음이 명확하지 않던 때다. 그저 호기심에 시작한 교회생활이 일상까지 변화를 주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내 마음의 문을 제대로 두드리고 계셨다.

"[계3:20, 개역한글]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과의 인격적으로 어떻게 만나셨나요?"

그리스도인에게 많이 묻는 질문이다. 죄로 멀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보 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삶으로 간증하는 건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문제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변하고 싶어지는 연속성으로 삶을 채워나가는 정체성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인간으로 보내주셨다. 대신 죽을 만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랑의 소식은 나에게 어떻게 다가왔나?


교회에 정착한 지 일 년 정도 지났을 때였을 거다. 주보에 적힌 교육부서 봉사자 모임에 눈길이 갔다. 말을 잘하는 편도 아니고 오히려 버벅될 때가 많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계속 눈길이 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향적이지만 하고 싶었던 이유는 결국 적극적으로 관계에 뛰어들어보고 싶어서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용감하게 기독교동아리를 선택하고 자유로워 보였던 친구 A양의 모습을 보고 들었던 질문을 떠올려본다. '나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 질문이 내 마음문을 두드리는 하나님의 노크소리였던 것 같다. 그렇게 선택한 교육부서에서 예수님의 존재를 더욱 가깝게 느끼게 되었다. 교육부서 목사님이 하셨던 설교메시지가 기억에 남는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고통인지 전하는 말씀에서 나는 이렇게 느꼈다.

'예수님은 나의 모든 고통에 공감해 주실 수 있는 분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났다. 그분이 보이지 않음에도 내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회피형이다. 사람관계의 마찰에 힘들어하고 쉽게 우울해하는, 그래서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넘겨짚고 내 마음에 무심하게 지나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생활을 시작하며 많이 부딪치는 연습을 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교회생활을 적극적으로 한 시점부터 오늘날까지 다양한 섬김을 했다. 초등학생이나 고등학생 교육부서부터 청년부의 새가족팀이나 양육리더까지. 때론 장기결석자로 회피형 그림자가 단골처럼 찾아왔지만 교회로 다시 돌아왔다.


그건 결국 내가 만난 예수님의 존재가 너무 따스해서였다. 사람관계가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잡았을 때 회피하고 싶은 순간까지도 결단하게 만드는 울림이 있었다. 아직도 사람관계에서 쉽게 긴장하고 손떨림은 기본이지만, 빵빵한 볼살이 자주 붉어지며 어리숙한 내가 튀어나오지만 그대로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안심이 든다. 예수님은 내 모든 아픔을 함께 경험하신분이니까. 그분 안에서라면 내 모습 그대로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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