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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했던 뿌리5

모두가 가진 그림자

by 단팥빵의 소원

'내가 예민한 건가.......?'

가끔 사람들과 살아가다 보면 속좁아 보이는 내가 있다. 그 정도는 신경 안 써도 되는데, 혹은 사람들 사이에서 소소한 티키타카에 예민해져 있는 나를 발견한다. 때로는 그 부정적인 반응은 나의 결핍, 뿌리와 연관 있어 보인다.


크기는 달라도 결국 모두 상처를 가지고 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뿌리가 있다. 수치스러워 깊은 곳에 숨기고 있다. 평범하게 일상을 살다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건 선명하지 않고 그림자 같다. 실체를 숨기고 어두운 속내를 드러낸다. 타인이 보기에 흐릿하게 다가온다. 관심을 가지고 잘 관찰해야 조금 보이는 정도겠지. 보이지 않게, 불안하게 안착한 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의식과 짝을 이뤄 좁은 시야를 형성한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기도 한다.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건 다른 사람이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거다. 나의 인생은 타인이 가질 수 없다. 아픔의 영역은 타인이 경험하지 않았기에 나에게만 보이는 십자가 같다. 억울하게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 지고 올라가신 예수님을 떠올려본다. 감히 그 무게를 헤아릴 수 없지만 내 어깨에 메고 감당해야 할 짐 같다는 생각을 한다. 타인이 매어줄 수 없는 나만의 결핍이다. 그만큼 타인이 함부로 말하고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겠지? 결국 '내가 예민한 건가.......?'란 질문은 자학하는 것 같다. 내가 아픈 만큼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예민함을 너무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개개인이 가진 기질은 천차만별이다. 인생의 마라톤을 하며 누군 걸어가기도 하고 뛰어가기도 한다. 지팡이에 기대어 가기도 하고 휠체어를 타고 가기도 하겠지. 다양한 속도로 겪는 개성이 있다. 각자가 가진 성향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도 다르다. 틀린 게 아닌 나만의 자연스러운 감정이고 느낌인데. 예민한가라고 자책하는 순간 내 감정은 소중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나 스스로를 타인의 시선에 맞춰 스스로를 공격하는 편견을 만든다.


교회생활 N연차, 공동체와 친하기 전 교회라는 곳은 나에게 다른 세계 같았다. 평온한 모습으로 예배드리고 따뜻한 인사를 건네는 모습에서 고통은 찾아볼 수 없는 곳 같았다. 대예배 때 조는 사람들 모습까지 평화로워 보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똑같이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 모두가 불안함을 가지고 있다는 건 너무 당연하잖아!


예수님께서 두드리신 마음의 문을 열고 교회공동체에 발걸음 했다. 그럼에도 교회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선을 그었던 나를 떠올린다. 다른 사람의 말에 너무 쉽게 자책하고 흔들리는, 내가 만드는 나에 대한 편견이 불편한 마음을 만들었다. 나를 가두다 보니 타인을 더 좋게 보면서 나를 내려치기 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다들 나보다 잘난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안정적인 인격을 가지고 있어 보였다. 상대적으로 소심하고 낯가리는 나 자신과 비교하게 되는 게 너무 초라했으니까........ 불완전한 나를 들키기 싫었다.


그런 나의 피해의식을 되돌아보니 깨닫게 된다. 남의 상처를 예민하다고 말하는 사람과 비슷한 결을 내 안에서 발견한다. 상대방을 제대로 볼 수 없으면서 함부로 판단했다는 것을 말이다. '어라, 이것도 교만이구나'싶다. 상대방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모른다. 어떤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면서 '저 사람은 나랑 다를 거야'라는 좁은 시야로 상대방을 대했던 한심함을 발견했다. 상대방은 성숙하게 자신의 불안했던 뿌리를 타인을 이해하는, 성숙한 열매를 맺어가고 있을 수도 있다. 하나님과 소통하며 매일 새사람으로, 신앙의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지체일 수도 있다.


빙산의 일각만 볼 수 있는 사람을 뛰어넘어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품이 있다. 내가 어떤 십자가를 지고 가든 하나님께 매달리며 얻게 되는 사랑이 있다. 교회공동체는 건물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십자가의 사랑을 닮아가며 커져가는 거겠지.


'내 알을 깨고 나올 거야, 어떻게든 따뜻함을 발견해 낼 거야'

다짐해 본다. 내 마음에 베인 상처가 나를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타인의 아픔을 더 잘 볼 수 있는 사랑의 도구가 되기를 바란다. 내 입장만 생각하는 시야를 부셔보려고 한다.


뭔가, 줄다리기하는 느낌도 있네? 한쪽 끝에는 나를 가두는 피해의식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상처받은 치유자의 사랑이 있다. 온전히 사랑하실 줄 아는 하나님의 힘을 빌려 사랑이 있는 쪽으로 힘을 쫘악 당겨본다. 맞은편에서 만만치 않은 힘으로 당겨오지만 버텨본다


그래, 매일 이렇게 나 자신을 부수며 나아가본다. 힘들지만 상처받아본 사람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모두가 드러나지 않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을 거다. 내가 함부로 보지 못하는. 그리고 서로에 대해 모르지만 그래서 서로 아픔으로 연대되어 있지 않을까 예상해 보게 된다


최근 보컬수업을 받으며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신이 있다면 이겨낼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준다고 생각해요" 수업도중 자신이 쓴 작사이야기를 하며 보컬선생님이 말했었다. 그는 무신론자였다. 연예계에 종사하는 만큼 화려해 보이는 모습이 있었다. 그는 이성적으로 보여서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말하다 보면 스스로 열심히 살았다는 자신감도 넘쳐 보여서 예상하지 못했다. 몰랐는데 도슨트처럼 가사의 어두운 배경을 설명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림자색이 꽤 짙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 한 번 느낀다. 내 울타리를 넘어 타인에게 존재하는 그림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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