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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시선

극복하고 있는 과제

by 단팥빵의 소원

"재 중학교 때 이상한 아이였대"

"이야기해 보니까 이상하지 않은대?"


학창 시절 들었던 이 두 마디가 아직도 가슴 깊이 박혀있다. 걸어서 20분 안 걸리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의 일이다. 꽤 먼 곳의 고등학교로 배정받았다. 중학교 때도 한두 명 겨우 사귀던 조용하고 낯가리던 성격이었나, 아니 혼자 도서관에 짱 박혀 있던 시간이 많았지?


서울에서 중학교를 겨우 한 달 다녔나? 풋풋한 중학교 1학년, 봄이 지나가기 전 바로 근교로 이사 가면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후 두 번째 전학이었다. 낯선 환경과 사람들. 겨우 동급생들과 친해지려는 찰나, 빽빽이 적힌 롤링페이퍼 편지를 받고 다른 학교로 전학 갔다. 롤링페이퍼에 담긴 한두 달 치의 마음은 봄날의 햇살이었다.


"띠라띠로리라라♪" 쉬는 시간과 공부시간이 교차하는 시점 울려 퍼지던 엘리제를 위하여가 생각난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다르게, 깨진 소리처럼 시끄럽게 울려 퍼지던 교정은 여중학교와 여고등학교가 함께 있었다. 교복치마를 입고 우르르 몰려다니던 짧은 시절 경험한 장난스러움이 좋았다.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던 단짝도 있었고, 익숙한 얼굴들이 있어 좋았다. 오래 알던 정이 있었다.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친숙함이 모든 걸 덮었던 한두 달이었다. 아등바등 친해지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오고 가는 시간이 좋았다


"귀여운 척하는 것 같아"

봄이 지나가려는 무렵 전학 간 중학교에서 1학년 때 들었던 말이다. 체육시간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높이 올려 철봉을 잡고 뒷짐을 지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동동거리던 발모양새가 그렇게 보였나 보다. 나름 아이들과 친해지려고 몇 마디 목소리를 겨우겨우 내고 있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애니메이션 이누야샤에 푹 빠져있었던 시절, 동지를 만나 수다를 떠는 노력도 해본다. 그렇게 쌓아가려는 친밀감은 금방 무색해지는 것 같았다. 어떤 무리가 하는 의도모를 게임에서 안 좋은 기류를 발견했다. 내 필통을 가지고 '숨은 보물찾기'하듯 놀려대는 장난에는 '뭐지' 싶었던 예감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동급생의 비호감을 느낄 수 있었던 기억은 그거다. 학교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었을 거다.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교실에서는 내가 철봉을 잡고 뒷짐 지는 모습을 따라 하며 하는 말은 나를 향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새 학기에 비슷한 성향끼리 뭉치는 무리가 형성된 시점에서 전학 온 나는 '굴러들어 온 돌'이 된 느낌을 받았다. 한 학급에 40명이 있다면 모두가 나를 불편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스스로 이방인이 된 기분에 사람을 이리피하고 저리 피하며 혼자만의 시간에 빠져있었다. 1박 2일로 시끌벅적한 수련회나 밖에서 친한 무리끼리 뭉쳐서 시간을 보내는 체육시간이 싫었다.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수업시간이 끝나면 눈을 감고 책상에 엎드려있는 시간이 많았다. 북적북적대는 사람들이 싫었다.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으로부터 도피하듯 중학생 3년을 보냈다. 고등학교는 버스를 타고도 30~ 40분 정도 걸려야 했던 먼 거리였다. 농담 삼아 '등산길'이라고 부를 정도의 높은 등굣길을 자랑하는 그곳으로 결정되면서 오히려 안도했었다. '다시 시작하면 돼'라는 마음이 있었다. 새하얀 초심으로 동년배에게 다가가보자는 다짐을 한다. 나름 단단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소문으로 너무 쉽게 산산조각 부서져 버렸다.


3월 어느 순간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재 중학교 때 이상한 애였대"

내가 배정받은 고등학교 1학년 반에는 나와 같은 중학교를 나왔던 아이가 있었다. 조용해 보이던 그 아이에게 한 친구가 물어보는 소리까지 들렸다. "OO이 중학교 때 이상한 아이였다는데 알아?" 내가 들리는 거리에서 싸늘하게 물어보던 그 목소리가 기억난다. 나를 알지도 못하는, 고등학교에서 처음 본 그 아이가, 내가 들리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질문하던 그 순간이 불편했다. 질문을 받은 그 아이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부정적인 답변은 아니었고 "그런 아이 아닌데..."정도의 짧은 답변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또래들 사이에 그 한 명의 답변은 소문을 이길 위력이 없었다. 나를 향해 웅성대는 목소리는 며칠간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향해 수군대는 비난의 화살이 너무 싫었다. 내가 그들에게 뭘 잘못했나? 억울하다고 화내고 투정 버리기엔 맞받아쳐야 하는 존재가 너무 거대하게 다가왔다. 사람들 속에서 내 감정은 얼어붙었다. '두려움'만 남은 채 내 몸은 부들부들 내 존재가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순수하게 다짐했던 마음이 무산되었다. 그냥,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내 목소리를 삼키고, 조용히 다니다 보면 호기심에 몇 마디 말을 건네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소멸시켜버리고 싶은 존재감을 부여잡고 등교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정말 가기 싫었던 수련회가 다가왔다. 일부러 아프고 싶어서 주문 걸듯 창문을 열고 배를 까놓고 별짓을 다했던 것 같다. 아이스크림도 일부러 몇 개씩 먹어주고 말이다. 답답하지만 죽어도 부모님에게 "나 정말 힘들어서 수련회 가기 싫어요"라는 말은 꺼내지 못하고.


1박 2일이었나, 2박 3일이었나?

꿈처럼 흐릿하게도 기억나지 않는 그 시간, 한마디만이 명료하게 기억난다. "이야기해 보니까 이상하지 않던데?" 나 혼자 조용히 이불에 숨어 잠들려고 눈감을 때,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명확히 나라고는 하지 않지만, 그 타이밍과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건 내 이야기였다.


질풍노도의 시절이라고 불리는 사춘기, 참 대부분의 사람들이 폭풍을 경험한다. 내면이 휘몰아치거나, 외부적 환경이 몰아치거나, 두 가지 모두 뒤섞여 나를 뒤흔들어 버리는 회오리가 되거나. 그 속에서 획득하는 안경이 있다. 다양한 경험을 하고 그걸 겪어내면서 나만의 시선이 생긴다. 때론 미치도록 부정적인 마음이 튀어나오고 따뜻한 경험이 부어주는 긍정적인 마음이 있다.


"이야기해 보니까 이상하지 않던데?" 그 한마디를 뱉던 아이는 이 경험으로 무얼 얻었을까?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사람을 보는 눈과 겪어내고 난 뒤, 소문으로 씌여진 편견의 안경을 벗어버린 눈. 두가지 시선을 획득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니면 그냥 인생에서 기억나지 않을 순간으로 흘러보낼 수도 있다. 당사자가 아니니까, 상대방에게 뼈져리게 와닿을정도로 힘든 순간은 아니었으니까


10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나는 아직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 무서울 때가 있다. 상대방의 눈빛에서 묘한 감정을 발견했을 때, '저건 나를 불편해하는 눈빛인데'라는 마음이 든다. 내가 상대방 속에 들어갈 수 있는 독심술사도 아니면서 부정적인 안경을 쓰고 상대방을 경계한다.


때론 이런 내가 싫었다. 어릴 적 경험이 왜 아직도 뇌리에 남아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걸까, 왜 아직도 사람들이 무서운 걸까 스스로에게 풀리지 않은 물음표로 자학했다. 지금은 그냥 그런 부정적인 나를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부정적인 실체를 내버려 두고 '괜찮아'라고 억지로 위로를 건넬 순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나이 들고, 삶의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어린 시절 그림자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구체적으로 나를 짓누르고 있는데 안 보이는 척할 수 없다. 힘들수록 그냥 솔직하게 직면하려고 한다. 소심한 내 기질로 새겨진 부정적인 경험, 그 흔적은 어쩔 수 없다. 그 경험 나름대로 얻어간 교훈도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련다. 내 마음에 값비싸게 스크래치내고 얻어간 경험치라고 해야 하나, 나 스스로도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상처 주는 사람이란 걸 깨닫고 소문으로 상대방을 판단하지 말자.


일단, 그 시절 상처받은 내 안의 미성년자는 인정해 주고 제대로 마주해보려고 한다.

그렇게 인정하면 보이는 시선이 있다. 나의 부정적이고 미성숙한 시야를 관찰하는 거다. 그리고 비합리적이라고 말해주는 거다. '왜' 비합리적인지 말이다. 어른인 내가 내면의 숨은 아이에게 성숙한 위로를 주는 거다.


"다른 사람이 너에게 안 좋은 눈빛을 보내는 것 같니, 그런데 그게 뭐가 중요하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순 없어. 모든 사람과 '하하 호호' 친해질 순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부정적인 건 아니야. 세상에는 다양한 성향의 사람이 있고 안 맞고 불편하다고 해서 나쁜 건 아니야. 그냥 너무 신경 쓰이면 조심스럽게 '혹시 불편한 점 있나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실체를 파악해 볼 수도 있는 거야. 질문하면서 상대방을 더욱 이해하게 되고, 내가 가진 쓸데없는 두려움이 별거 아니라는 확인까지 얻게 되겠지"


그렇게 내면의 나와 대화하면서 두 개의 시선을 획득해 본다. 상처받은 나와 치유하려는 나

상처받은 자의 입장도 헤아려보고, 치유하려는 나의 시선도 획득했다. 그렇게 상처받았기에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중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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