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되고 발전하고 있나요?
때는 21년 12월, 한겨울에 적었던 글이 있다. 삼다라는 글쓰기 공동체에서 '생태적 감수성이라는 주제로 카페에 글을 올렸다. 선명하게 전해지는 그날의 다짐은 그대로인데 벌써 약 3년이 지났다.
어떤 글쓰기를 할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머릿속에는 오래전 글쓰기 공동체에 올렸던 글들이 떠올랐다. 미완의 타임머신 같은 글을 골라 퇴고하고 싶었다. 조금 더 세련되게 다듬고 정돈하고 싶은 마음으로 다음카페를 방문했다. 당시 참석한 글쓰기 모임에서 주기적으로 과제가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글쓰기, 책 읽기, 많이 생각하기. 세 가지를 많이 하자는 '삼다'의 의미가 담긴 글쓰기 모임이었다. 그걸 다음카페에 마음껏 글로 정리해야 했지만 과제의 50% 이상은 하지 못했다. 대학생수업이었다면 F, 낙제감이었다.
겨우 짬을 내 작성한 과제들도 끝이 아니었다. 바로 글쓰기에 중요한 '퇴고'를 거쳤다. 두 명이 짝을 지어 퇴고하고 단체가 함께 퇴고한다.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시던 원장님의 퇴고까지 거치는 크로스에 크로스 체크가 이어졌다. 그러면서 글은 부드러워졌고 재밌는 표현이 추가된다. 여러 단계를 거칠수록 글은 아름다운 보석처럼 세공되었다. 남들이 보기 좋은 가독성이 두드러졌다.
2021년 12월 7일 다음카페에서 발견한 <생태적 감수성>
이번 주 삼다 독해 주제는 생태적 감수성. 아무렇지 않게 1회용 물티슈로 아침마다 사무실 책상을 정리하며, 아무 생각 없이 생태계에서 오는 음식들을 먹고 있는 나의 일상적인 삶들이 '희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잊고 사는 나였다. 하지만 이번 강의를 통해서 그 무게에 대해 묵상하게 된다.
'획일성'에 대해 초점을 맞추며 '사회적', '신학적', '생태적'으로 살펴보는 강의를 통해 특히 마음에 들어왔던 단어가 있는데 바로 '생태계에 빚진 마음'. 생태계가 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결코 자연을 쉽게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생태계 감수성은 이런 강의나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다짐'을 불러오는 듯하다가도 실천의 영역에서 다다르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그런 부족한 마음이 떠오르기도 하고 '생태계에 빚진 마음'을 말할 때 가장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 건 음식이었다.
"음식은 상품이 아니라 피조물 공동체, 생명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피조물 공동체의 지체인 동식물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준 것이 음식입니다. 여기서 한 번 더 깊게 생각해 보면, 먹는 일은 죽음과 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먹지 않으면 우리가 죽고, 누군가 죽어야 우리는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의 죽음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생명 공동체 일원의 죽음이 없으면 먹는 일, 즉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복음과 상황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식전기도를 올리며 감사하다고 하지만 그건 단지 형식적인 태도일 뿐 진심이 담겨있지 않는 허울뿐이다. 몇 달 전 복음과 상황에서 마주한 위 구절은 내 마음을 울린 듯 하지만 이 역시 그 순간뿐이다. 내가 먹는다는 행위가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의미인지 깊게 생각해 보게 만들었던 위 구절은 마음속에 소화시키려다 어디론가 배설해 버렸다.
생명체가 피를 흘린 값으로 내 앞에 한 끼가 주어진다. 돼지의 목숨은 내가 좋아하는 돈가스로 둔갑하기도 하고, 농부들이 자기 자식처럼 피땀 흘려 양육한 벼한 톨이 수십 톨 수백 톨 모이고 모여 나의 한 그릇이 된다. 몇 달 전 읽었던 위의 내용은 나의 하루가 생명체의 희생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는 게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결국 생태계가 우리에게 주는 건 그들의 고귀한 생명인 거구나. 예수님께서 사람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치셨던 것처럼.
참 그런 부분들을 생각할 때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튀어나와야 하는데 이기적인 마음이 아직 강하고 난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예전 삼다 줌모임을 통해 버려지는 옷이 불러오는 '환경오염'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도 가지며 쓸데없는 옷소비는 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기도 했지만 나의 충동소비 1순위가 '옷'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는 듯하다. 그리고 물티슈 원단에 플라스틱과 방부제가 들어있어 자연을 괴롭힌다는 기사를 접한 내가 마음속에 '당분간 물티슈 금지'라는 푯말을 세겼지만 결국 작심삼일이 되었다.
뭔가 나의 생태계 감수성은 일회성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 마음에 품고 금방 버리니 지속되지가 않는다. 나의 마음속에 전심으로 '생태계'에 빚진 마음'을 품고 살아가기에 아직 난 갈 길이 멀다
생태적 감수성은 퇴고가 없는 원석 그대로의 작품이다. 21년도 몇 개월에 걸쳐 작성한 과제들 사이에서 퇴고할 몇 가지를 선택해야 했다. 이 녀석은 수많은 글쓰기 중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낙제했다. 선택받지 못했다. 내 인생에 더 와닿는 글들을 선택하고 생태계 감수성은 뒷전으로 미뤄졌다. 그리고 나의 진짜 생태계 감수성도 퇴고하지 못했다. 그대로일까, 퇴화했을까?
매년 심각해지는 기후위기에 나는 더 둔감해지고 있다. 다시 한번 퇴고를 준비하며 나의 생태계 감수성을 발전시키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