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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했던 뿌리1

에라 모르겠다

by 단팥빵의 소원

"일부러 그랬지..?!"

아버지는 손에 골프채를 들고 나에게 소리쳤다. 나의 목소리가 움츠러들었던 그날은 1990년대였다.

꿈처럼 흐릿하게 기억나던 그날은 20년도 더 된 날의 이야기다

"아니요"

음소거에서 겨우 한 칸 키운듯한 성량의 소리로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 당시 2살 어린 여동생이 있던 나는 첫째였다. 질투심이 많던 초등학생 시절 둘째를 자주 질투하면서 경쟁심리도 자주 튀어나왔다.

'그렇다고 그렇게까지는 안 했는데'


아버지와 여동생, 나 이렇게 세 명이서 집 근처의 뒷산을 오르고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걸었던지 운동화 끈이 풀렸었다. 쪼그려 앉아 바로 묶었던 순간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묶고 일어나니 아빠와 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가던 방향을 돌려 살펴보던 중이었다. 뒤에서 아버지가 강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거칠었고 분명히 화난 목소리였다.

“동생이랑 먼저 가서 삐진 거지? 아니면 왜 반대편으로 간 거니?”

“아니에요. 아버지와 동생이 보이지 않아서 그랬던 거예요!”

내 목소리에 아버지 표정은 더 굳어갔던 것 같다. 아버지는 강경했다.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왜 거짓말을 하냐며 나무랐다. 그리고 "진실을 말할 때까지 때릴 거야"라며 골프채를 손에 드셨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난, 맞는 게 너무 아파서 일부러 그랬다고 거짓말을 했다.


아마 내 나이대 자녀를 둔 부모님은 가부장적인 분이 많지 않을까 싶다. 1950~60년대에 태어나 대한민국 격동의 시기를 세대. 마음의 여유가 없기에 “부모는 어떻게 자녀와 소통해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보다 “어떻게 해야 온 가족이 먹고살까”라는 생계형 질문으로 삶을 버텨내셨을 거다

그런 삶의 줄다리기에 부모님도 여유가 없으셨을 거다. 그 점이 어린 나에게는 거칠게 다가왔다. 특히 아버지는 사랑하는 법이 매우 서투셨다. 또한 무엇보다 '자녀들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강하게 매로 키워야 해!’라는 생각이 강하셨던 걸로 보인다.


내식대로 이해하려고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겪었던 폭력은 골프채가 끝이 아니었으니까. '술'과 콜라보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의 학창 시절은 그 여파로 스스로를 학대한 적도 있었다. 죽을 자신은 없고 삶에 절규는 내던지고 싶어서 커터 칼로 소심하게 손등을 그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 몇 줄을 그었었다. 몇 번을 반복했던 것 같다. 십몇 년이 지난 지금도 왼쪽 손등에는 하얗게 빛나는 빗줄기 모양의 흉터 자국이 남아있다


"성경을 읽으면 많이 찔려, 내가 가족에게 줬던 상처들이 떠올라"

20살을 넘긴 지 얼마나 되었을까. 교회 청년부에서 양육 리더 섬김을 결정한 순간이 있었다. 매주 성경 나눔을 주도해야 하는 입장에서 마음이 버거웠다. 매주 새로운 성경 말씀으로 준비해야 하는 부담감에 아버지에게 같이 공부하자고 용기를 낸 적이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아버지와 일대일 나눔에 아버지는 이런 고백을 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 하나님을 만났다. 그분의 어린 시절, 통성기도를 하는 교회공동체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하셨다. 그 분위기가 무서워 기독교와는 담쌓고 사셨다고 했다. 그 이후로는 전혀 생각 못하셨겠지.. 본인이 무너지시고 하나님을 만나게 될 줄은.


아버지는 알코올을 원료 삼아 전쟁을 일으키던 시절을 지나 가족들이 상처받을 대로 받고 나서 하나님을 만났다. 여전히 무너지고 일어나고를 반복했지만 노력하셨다고 생각한다. 변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하나님을 만났으니까...

여전히 '정말 왜 그러셨을까?'라는 응어리는 사라지지 않지만


정말 쓰기 싫으면서도 터트리고 싶을 때가 많았다. 가족 이야기는 함부로 폭로하고 싶지 않았지만 뭐랄까, 지금의 나에게 지독하게 영향을 준다. 어릴 적 존재하던 불안한 세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사람 관계에 쉽게 긴장하고 성인 남성의 큰소리에 깜짝깜짝 자주 놀란다. 자존감은 아직도 바닥이구나 싶은 에피소드가 계속된다.


'이게 뭐 꽁꽁 숨겨놓고 싸매기 좋은 거라고 혼자 힘들어할까...?

아등바등 살아오며, 마흔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조금 있으면 세계가 멸망할 것 같았다. 기후 위기는 매년 더 가깝게 느껴지고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게 자원을 과소비하고 나 역시도 그렇다. 고치기 힘든 지구를 살아가며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내가 겪은 고난을, 그로 인해 아직 남아있는 마음의 상처를 적나라하게 적어보고 싶었다.


2019년 연말, 코로나가 찾아오고 일상에 많은 제약이 생겼다. 사람이 서로 대면하여 소통하는 게 어려워지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며 장벽이 생긴 일상에 블루가 침투했다. 밑도 끝도 없어 보이는 우울감에 회의감을 느꼈다. 삶이란 원래 이런 건가 싶었다. 연달아 발생하는 고통 속에서 버텨내는 게 인생이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내 안의 수치스럽고 힘듦을 표현하고 싶었다. 힘들다고 아우성치고 싶었다.


나 혼자 꽁꽁 싸매면 쓰레기가 되지만 표현하는 순간 누군가는 알아줄 것 같은 예감이다.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누군가가 될 수도 있겠지. 물론 이런 쓸데없는 걸 왜 올리냐고 악평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공감해 주는 딱 1명의 존재가 굉장히 고프다.


이건 찝찝하면서도 내가 진짜 적어보고 싶은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이런 고통을 만나게 하신 건 의미가 있을 거다.

계속 내 삶을 되돌아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을 찾고 싶다.


"에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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