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출산장려에세이 #"허니제이씨, 제가 사과할게요!"
얼마 전, 나 혼자 산다(MBC)에서 임신한 허니제이를 방출(?)하는 내용이 방송된 적이 있다.
스튜디오에 앉은 MC와 패널들 허니제이에게 부럽다! 축복한다! 했지만, 난 그 장면이 너무 슬펐다.
'나 혼자 산다'가 어떤 프로그램인가? 시청률 면에서도 화제성 면에서도 압도적으로 잘 나가는
예능프로그램이다. 우리 가족도 매주 금요일이면 그 늦은 시각까지 나 혼자 산다를 즐겨본다.
박나래의 배설 에피소드(팜유 달랏 세미나 편)에 초등학생 둘째가 데굴데굴 구르고
중년 남편은 얼굴이 벌겋게 되도록 웃는 걸 보며 세상 많이 달라졌구나! 했다.
오래전(90년대 중반) 내가 예능작가로 일하던 시절엔 예능국 CP분이 작가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예능이라고 해서 아무거나 쓰면 안 된다며 특히 '방귀' 얘기 같은 거 쓰지 말라고 했다.
세상은 변화하고 있고 나 혼자 산다는 그 흐름을 잘 반영하는 느낌이다.
이렇게 핫하고 힙한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음주운전도, 마약도 아닌
임신과 결혼을 이유로 떠나게 되다니...
"허니제이... 너무 아쉬울 거 같아. 임신은 좀 있다가 하지.
아니 아니 결혼도 좀 있다가 하지! 지금 한창 잘 나가는데... 아깝다.
여자는 임신하면... 아무것도 못해."
작년 연말에 방영한 연예대상 프로그램에서 '나 혼자 산다' 팀이 한 테이블에 모여 앉아
신나게 웃고 떠들 때도 난 허니제이를 생각했다.
허니제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녀는 지금 행복할까?
남편은 빼고, 두 딸(대학생, 초등학생)과 함께 제주도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다.
큰 애 대학 합격하고 둘이 다녀온 지 4년 만이다.
그때 언니랑 엄마만 제주도 여행 가는 걸 보며 공항에서 눈물짓던 둘째는
이제 6학년이 되는데, 코로나 탓, 기저질환 탓하며 계속 집에 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큰 애는 이번 학기에 드디어 복학을 한다.
코로나 때문에 휴학을 결정하고 잠깐 방황도 했지만
다행히 목표를 정해 스페인어 공부에 매진해 결국 자신이 얻고자 한 점수에 도달했다.
점수를 확인하고 방방 뛰며 기뻐할 때, 나도 눈물이 찔끔 났다.
개학하면 둘 다 바빠질 텐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날까 싶어 당장, 당장 떠나기로 했다.
불쑥 제주도 여행을 떠나겠다고 하자 남편은 황당하다는 반응이었지만
난 그런 남편을 집요하게 달달 볶아 결국 비행기표 예약 성공했다.
우리는 월요일 아침 10시 5분 대한항공 제주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잠시 후 제주 공항에 도착해 8번 게이트로 나가 1번 구역에 있는 셔틀을 타고
무지개 렌터카 회사로 갔다. 거기서 차를 받고 서귀포 쪽에 있는 숙소를 향해 달렸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소노캄, 예전에는 샤인빌이었는데, 큰 애 초등학교 3학년 때 머문 적이 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위치가 바다 끝이라 풍광이 아름답다.
큰애는 그곳 야외정원에 추억이 있다고 했다.
숙소로 가는 길에 '전지적 참견시점'(MBC)에 나온 음식점(명호돗갈비)이 있길래
점심을 거기서 먹고 숙소로 가 체크인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1시 정도밖에 안 됐던 거 같은데, 이미 준비된 재료가 소진돼 손님을 더 이상 받지 않는단다.
오후 4시 30분부터 현장에서 저녁 식사 예약을 받는데 선착순으로 30개의 테이블을 채우면 끝이란다.
포기하고 차를 돌려 나가려는데 뒤이어 다른 차들이 연달아 들어온다.
TV에 나온 고기를 먹을 생각에 흥분했던 둘째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얼른 대안을 찾아야 했다.
좁은 골목길에 왠지 내공 있어 보이는 식당이 하나 눈에 띄어 얼른 들어갔다.
식당 이름은 해조네. 성게비빔밥, 성게미역국, 성게칼국수 세 개를 시켰는데
각 메뉴의 가격이 2만 원이라서 좀 놀랐다.
내가 너무 물정을 모르나? 다행히 맛은 있었다.
공깃밥 리필이 가능해 우린 두 번이나 공깃밥을 추가했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큰 애의 추억이 어린 야외정원으로 갔다.
둘째는 춥다며 나가기 싫다고 투덜거렸지만 막상 가니 좋아했다.
산책길을 달리고, 검은 돌이 가득한 해변 곳곳을 샅샅이 뒤진다.
사실 난 좀 무서웠다.
왠지 시체 같은 거 나오면 어떡하지? 뉴스,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
아이는 두려움도 없이 그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판타지 소설의 어떤 장소처럼 느끼는 걸까?
주부에게 여행이 아름다운 이유는 끼니를 차릴 걱정이 없다는 것.
하지만 회를 먹자는 큰애, 고기를 먹자는 둘째로 의견이 팽팽하게 갈리자 분위기가 살짝 컴컴해졌다.
갑자기 큰애가 갑자기 근처에 올레시장이라는 데가 있다며
거기 먹을 게 천지란다. 그렇지! 시장엘 가면 고기든 회든 다 있겠지!
4년 전 큰애와 나는 구좌읍 쪽에 머물며 동문시장을 방앗간에 참새 드나들듯
왔다 갔다 했었다. 거기서 천혜향도 사고, 성게미역국도 먹고, 야식도 사다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 동문 시장에 들러 천혜향과 수산물을 살 계획도 나는 야무지게 세워두었다.
올레 시장에 도착해 주차타워에 주차를 하고 시장을 향해 몇 걸음을 걸으니
씨앗호떡집이 나온다. 호떡을 받기 위해 긴 줄이 서 있다.
그 옆엔 횟집인데, 수조 속에서 고등어가 펄펄 뛴다.
[제주도에는 고등어가 살아있다]라고 쓴 팻말이 눈에 띄었다.
시장 넓은 길에 흑돼지 집이 있긴 했는데, 웬일인지 손님이 별로 없었다.
큰 애가 이런 데는 맛집이 아니라며 내 팔을 끌어당긴다.
골목골목을 돌아보는데, 갑자기 눈에 띈 사람이 북적이는 흑돼지구이 식당.
딱 봐도 이 구역 맛집이 분명해 보였다.
근고기로 주문하니 검은 판에 돼지고기와 고사리 김치를 구워준다.
작은 종지에 담긴 젓갈은 멜젓인 줄 알았는데, 맛을 보니 고등어다.
언제나 고기에 진심인 둘째는 적당히 허기까지 찾아와 아주 맛있게 먹는다.
고깃집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큰애도 여긴 정말 최고란다. 자기가 선택한 곳이라 그런 건가?
돌아오는 길에 서귀포 이마트에 들러 아침에 숙소에서 먹을 빵과 쨈, 치즈, 커피, 물을 샀다.
둘째 날 아침 일어났는데, 우리 방 창문을 통해 일출이 펼쳐졌다.
"창문으로 일출, 무슨 일이야? 너무 멋지다!"
큰 애는 엄마 코 고는 소리에 잠을 하나도 못 잤다며
난리다. 내가 코를... 고나? 남편도 가끔 코를 곤다는 말을 했었지만 항상은 아니었는데
어쨌든 많이 피곤한 날은 코를 골았... 지. 엄마가 하루 종일 운전했잖아!
게다가 여행도 계획하고, 짐도 싸고.
(지난주 금요일엔 무려 35인분의 저녁식사를 책임졌다. 그럴 일이 있었다.)
페이스 타임을 켜고 집에 있는 남편도 함께 아침을 먹었다.
남편은 누룽지를 끓여 먹었다. 내 참 기가 막혀서...
우리가 제주로 떠나고 그가 마트에서 저녁거리로 산 것은 누룽지와 맛김치였다.
아침마다 닭가슴살과 유기농 로메인과 양상추 샐러드를 먹으면서도 시큰둥하던 그다.
오이고추에 설탕 한 꼬집을 안 넣었다고 짜다! 불평하던 그의 취향이란 게
누룽지와 맛김치라니... 이런 인간에게 음식 지적질을 당한 게 못내 억울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여기서 맘껏 돈을 쓸 수 있는 것도 그의 은혜(?)니
최대한 밝게 웃으며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고맙다고 고맙다고 여러 번 말해주었다.
이번 제주도 여행에서 오늘 일정이 가장 중요했다.
오전엔 소노캄 실내수영장에서 무려 3년 만에 수영을 할 것이고,
점심은 4년 전에 갔던 해녀가 끓여주는 라면 집? 그런 이름의 식당에 가서 물회를 먹기로 했다.
그리고 구좌읍 쪽으로 더 올라가 비자림과 만장굴을 보고
저녁은 동문시장에 들러 회를 먹고 야식 거리를 사서 숙소로 돌아오기로 했다.
일단 야외정원을 산책하며 준비운동을 하고,
수영장 개장 시간에 10분 전에 수영장 사우나 입구에서 열쇠를 받았다.
어찌나 마음이 설렜는지 모른다.
내가 엄마로서 이것만큼은 잘했다 싶은 게 있다면 바로 두 아이에게 수영을 가르친 거다.
특히 둘째는 건강을 위해 다섯 살 때부터 시작해 코로나 이전에 오리발 접영이 가능했다.
하지만 3년을 쉬었으니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드디어 물속에 들어갔다.
큰 애는 배영에 심취했는데 물에 누워 유리 천장 속 하늘과 구름을 보는 게 좋다고 했다.
둘째는 자신이 예전에 배운 모든 동작을 시도하며 아주 분주했다.
두 아이가 각자의 방식으로 물을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도 오랜만에 물살을 가르며 질주하니 가슴속에 꽉 막힌 것들이 뻥 뚫리는 듯 상쾌했다.
따듯하게 사우나까지 마치고 얼굴에 자외선 차단제를 꼼꼼하게 발랐다.
그리고 점심을 먹기 위해 해녀가 끓여주는 라면 집? 그곳을 향해 출발했는데...
결국 찾지 못했다.
내 기억으로는 그 식당이 성산일출봉 근처였던 거 같은데
막상 내비게이션이 안내한 곳은 중문단지 쪽이었다. 내가 헷갈렸나 하면서 찾아간 건데
우리가 갔던 식당이 아니었다. 심지어 중문 쪽 그 식당은 현재 영업도 하지 않는 상태였다.
다행히 풍광이 아주 멋진 곳이라 탐험을 하듯 두리번거리며, 여행이란 게 이런 거지!
하지만 수영까지 한 상태라 우린 점점 허기지기 시작했고
안 되겠다 싶어 일단 가까운 올레 시장을 향해 차를 몰았다.
시장에 가면 뭐든 먹을 수 있겠지 생각한 거다.
시장에 도착하니 둘째는 유튜브에서 봤다며 불에 구운 마시멜로 아이스크림을 먹겠다고 난리,
큰 애는 회를 먹자고 난리, 또 서로 다른 의견이 난무하며 정신이 없는데
허기는 폭풍처럼 밀려오고,
결국 시장 골목에 서서 버터전복볶음밥과 전복 김밥을 흡입하듯 먹어치웠다.
불에 구운 마시멜로 아이스크림은 둘째 손에 쥐어주고 점심 식사 끝.
이제 만장굴과 비자림을 향해 달려야 하는데 웬일이야?
만장굴은 낙석 문제로 현재 관람이 중단된 상태란다.
그럼 비자림에 가야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일 어차피 제주 공항으로 가려면
북쪽으로 올라가야 하니 그때 비자림에 가고
오늘은 남쪽에서 뭔가 다른 일정을 만드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 거다.
그렇다면, 테디베어뮤지엄. 인형 좋아하는 초등학생이라면 한 번쯤 가는 곳이 아닌가?
우리 집 초등학생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인형 '꾸이'를 캐리어에 담아 제주도까지 데리고 왔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테디베어 뮤지엄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이번 여행에서 느꼈는데 둘째는 지금 확실히 사춘기다.
뭔가 눈빛이 애매하게 어두워지고, 기분이 확 나빠졌다 확 좋아졌다 하는 게 너무너무 느껴졌다.
솔직히 큰애랑 나는 둘째 눈치를 많이 봤다.
그리고 테디베어 뮤지엄에서 사춘기의 모든 것이 폭발하는 걸 느꼈다.
사진도 찍기 싫어하고, 언니가 늘어놓는 추억담도 듣기 싫은 듯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내 인내심도 점점 바닥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테디베어뮤지엄엔 왜 의자가 없는 거야?
돌아다니다 보니 어찌나 허리가 아픈지. 빨리 보고 나가라는 건가?
짜증이 나려는데 마침 앉아서 공연을 보는 장소가 나타났다.
(예전엔 없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새로운 작품이 많아 볼거리가 풍성했다.)
난 잠깐이라도 앉고 싶어 홀린 듯 그곳으로 들어갔다.
둘째는 공연을 보는 게 싫다며 그냥 빨리 나가자며 부어터져 있다.
일단 난 앉아있겠다는 생각밖에 없어 끝까지 앉아 공연을 봤다.
아이는 무대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암튼 대단한 고집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 공연의 주인공은 엘비스 프레슬리였는데,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해 전혀 아는 바도 관심이 없으니 무슨 재미가 있었겠나? 싶기도.
곰인형 키링을 두 개 사고 테디베어 뮤지엄을 나와 바로 앞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거기서 난 좀 화가 났다.
하지만 제주도까지 와서 아이를 혼내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든 내 마음을 전달하려고 하는데, 큰 애는 엄마의 말이 길어지면 안 될 거 같다고 한다.
솔직히 내 한풀이가 길어지며 점점 화가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위험을 감지한 큰 애가 내 어깨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참을 수 있어! 엄마는 할 수 있어! 우연이는 지금 한창 사춘기라고!"
동생은 사춘기, 엄마는 갱년기... 우리 큰애가 고생이 많다.
덕분에 화를 삼키고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화를 삼켜서였나 갈증이 났다. 큰애가 주문한 비양도 선셋 어쩌고 음료를
꿀꺽꿀꺽 마셨다. 달콤한 홍차인가? 큰애는 이 음료가 카프리썬 같다며 웃었다.
차에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이번엔 진짜 회를 먹자고 다 같이 결의를 다졌다.
하지만 너무 지친 나머지 길가에 주차장이 넓은 식당으로 그냥 들어갔다.
이름은 제주 토속 음식점 [수희식당].
큰애가 물회를 시켰는데, 제주도 물회는 된장 베이스라며
일부 손님은 싫어한다고 했다. 큰 애도 새콤한 초고추장 물회를 생각했던 터라 다른 걸 먹기로 했다.
내가 선택한 건 전복 뚝배기와 고등어조림.
아주 오래전 제주도에 와서 고등어조림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진짜...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 맛을 아이들도 느꼈으면 해서 시켰는데
나중에 나올 때 보니 고등어가 노르웨이산이었다. 맛도 예전 같진 않았다.
그래도 이 식당에서 우린 많은 대화를 했다.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난다며 둘째가 입을 열었다. 이 고백을 듣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던가!
아이의 고백을 듣고 나니 비로소 내 마음이 풀렸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앞으로도 이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셋째 날 아침에도 창문으로 일출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 어제만큼 감흥이 크지 않았다.
사람 마음이란 게 이렇다.
남편과 페이스타임을 켜고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남편은 누룽지, 맛김치에 닭가슴살을 추가했다.
우리는 어제처럼 빵과 치즈 쨈 커피 그리고 귤과 천혜향.
소노캄 야외정원에 폭 빠진 둘째가 빨리 산책을 가자고 하는 바람에
급히 자외선차단제만 바르고 또 야외정원으로 갔다.
사춘기 아이가 뭘 하겠다면 하면 빨리 하게 해줘야 한다!
야외 정원이면서 올레길이기도 한 산책로 옆으로 난 계단을 내려가면
으슥한 돌해변이 나온다. 그곳을 깊이깊이 들어가 탐험하며 아이는 무척 재밌어했다.
그런데...
문득 주변을 둘러보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말았다.
여길 벌써 몇 번을 왔는데도 못 본 건데 이제야 그게 눈에 들어왔다.
갈색털과 힘을 잃은 검은 눈동자. 푸들 강아지의 사체였다.
캐나다 체크인에서 본 내용인데,
제주도에 강아지를 데리고 와 버리는 일이 빈번한데, 섬이라 완벽하게 유기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 강아지가 버려진 건지, 잃어버린 건지... 모를 일이다.
그냥 마음속으로 안녕이라고 말해주었다.
짐을 싸서 숙소를 나와 성산일출봉 쪽에서 식당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 해녀식당을 찾는다면 기적이고, 못 찾으면 어쩔 수없다는 각오로 운전대를 잡았다.
결국 못 찾았지만,
큰애가 흑돼지식당을 성공적으로 찾은 촉으로 어떤 식당을 골라 들어갔다.
그런데 메뉴에 물회가 없었다.
우리의 실망한 표정에 사장님의 마음이 움직였다. 메뉴에는 없지만 만들어주겠다고 하셨다.
갈치조림과 고등어구이 전복뚝배기로 구성된 2인세트와 물회까지.
놀라운 맛이었다. 물론 고등어는 노르웨이산.
물회는 새콤달콤했지만 살짝 된장베이스였다. 제주도 물회는 된장이 들어간다!
따로 접시에 담아주신 전복, 한치, 소라가 엄청나게 신선했다.
공깃밥을 추가해 차려주신 반찬을 거의 다 먹었다.
(우리가 나간 후 많이 놀라셨을 것이다. 그 많은 걸 다 먹다니...)
우연이가 식당을 나와 차에 타더니 식당 간판을 사진으로 찍어두며
다음에도 꼭 와야겠다고 했다. 꽤나 맛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정은 두 가지다.
비자림과 동문시장.
비자림에 가까워지자 도로변은 모두 비자나무 숲이었다.
토토로가 백 마리는 나올 만큼 아주 영험해 보이는 나무들이었다.
마침 우리는 오로라라는 노르웨이 가수의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신화적이기도 하고 엄청나게 웅장한 노래들이라 이곳 비자나무 숲과 잘 어울렸다.
사실 이번 우리 여행의 테마송은 (안타깝게도) 둘째가 완전히 꽂힌 노르웨이 가수,
오로라의 음악이었다.
솔직히 난 재즈를 들으며 운전하는 걸 즐기고, 큰애는 나른한 외국 힙합 듣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오로라는... 엄청나게 진지하고 웅장하다.
솔직히 좀 부담스럽다.
여행 첫날 하루 종일 오로라의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하고 두통까지 왔었는데
흑돼지집에서 고기를 먹으며 콜라를 마시자 머리가 쨍 맑아져 그냥 카페인부족인 걸로 판명됐다.
오로라의 노래와 비자나무 숲에 압도돼
운전을 하고 있는데
도로변에 걸린 플래카드가 보였다.
길을 넓히기 위해 비자림을 훼손하는 걸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2차선 도로를 넓히기 위한 도로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곳곳에 부서지고 꺾여 모여있는 비자나무 더미가 보였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비자림은 정말 아름답다. 여러 번 왔었다.
4년 전 큰애랑 제주도에 왔을 때 2박 3일 일정이었는데도
우린 두 번이나 이곳에 왔었으니까.
정해진 코스로 한 바퀴 산책처럼 걷고 출구로 나가려는데
큰애가 이렇게 잠깐 있다가 갈 순 없다며 한 바퀴를 더 돌자고 했다.
둘째의 격렬한 반대에 난감했는데, 큰애가 갑자기 동생에게 돈 만원을 주겠다 했다.
그러자 동생은 순순히 '한 바퀴 더'를 받아들였다.
다 같이 비자림을 한 바퀴 더 돌았는데, 생각보다 힘들었다.
돈 만원에 참고 같이 돌아준 우연이가 기특해 나도 만원을 추가 지급하겠다고 하자
잔뜩 내려갔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게 보였다.
비자림을 나와 동문시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렌터카 반납 시간을 확인하니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
목적지를 삼양해변으로 바꿨다. 혹시나 바다에 들어갈 일을 대비해 준비한 크록스 신발을
잠깐이라도 신을 수 있다면 좋을 거 같았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곳을 향해 차를 몰았다. 검은 해변이 눈에는 보이는데
들어가는 입구가 안 보여 좀 헤맸다. 다행히 카페 옆에 작은 입구가 있어 그곳으로 들어가니
검은 해변이 한눈에 들어왔다.
큰 애는 이곳에서의 우리 가족 추억담을 시작했다.
전에도 공항 가는 길에 들렀다고. 둘째는 언니의 추억담이 불편한지 뚱해 있다.
그 시절 자기가 우리 가족의 구성원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속상한 건가?
아이 눈치를 살피며 온 김에 바다에 발 한번 담글까? 하고 물어보니
의외로 순순히 그러겠다고 한다.
옳다구나! 맘 바뀌기 전에 신발부터 준비해야 할 거 같아 얼른 차를 주차해 둔 곳으로 달려갔다.
캐리어를 열어 내 것과 아이 것 두 켤레 크록스를 들고 다시 해변으로 왔다.
신발을 신으라 하니, 그냥 맨발로 간다고 한다.
나도 맨발로 아이와 함께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로 들어갔다.
어찌나 차갑던지... 진짜 깜짝 놀랐다.
잠깐 참방거리다 시간을 확인하니 이제 서둘러야 할 거 같았다.
해변을 나와 발 씻는 곳을 찾았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수돗가가 있어서
거기서 발을 씻고 차에 탑승했다.
운전을 하는데, 발이 여전히 차가웠다.
너무너무 차가운 그 느낌이 사라지지 않고 오래 남아 있었다.
문득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바다에 들어가길 잘한 거 같아.
들어가기 전의 나와 들어간 후의 내가 다른 거 같아.
... 그러니까 뭐든 안 하는 것보단 하는 게 낫겠어."
"엄마 잘했어! 우연이랑 둘이 좋은 경험한 거 같아.
여행 오니까 엄마가 훨씬 활기차고 좋아! 셀프 주유도 성공하고...ㅋ"
셀프주유는 나의 아킬레스건이다. 난 셀프주유가 너무너무 무섭다.
"제주도에서 2박 3일 동안 엄마 머리 팽팽 돌아가는 거 봤지?"
"응!! 엄마 최고야!"
"그리고 엄마... 허니제이한테 사과해야겠다."
그러자, 아이들이 빵 터진다.
"엄마 허니제이 임신하고 결혼했다고 그렇게 뭐라 하더니 마음 바뀐 거야?"
"그때 너희들 낳고 키울 수 있었던 거... 지금 생각하니까 정말 감사한 일이고,
잘한 일이야....(구구절절 중략)... 엄마 이러다 출산장려에세이 쓰겠다."
수다를 떨며 동문시장에 도착했는데 우린 그곳에 주차도 못했다.
근처 공영주차장도 만차 상태였다. 아! 생각해 보니 전지적 참견시점에 동문시장도 나왔다!
천혜향과 수산물은 그냥... 가까운 이마트에서 사기로 하고 바로 렌터카 반납장소로 갔다.
제주공항에서 무슨 정신이었는지 두 개의 캐리어를 수하물로 보내는 걸 깜박하는 바람에
캐리어 안에 있던 우연이의 필통 속 가위가 공항 검색대에서 걸리고 말았다.
검은 옷을 입은 공항 직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날 보며 뭐라 뭐라 말을 하니
좀 당황했다. 그리고 가위날의 길이를 측정하더니, 이건 위험하다며
버리든지 수하물로 부치라고 한다. 일단 가위는 버리라고 하고
다시 밖으로 나가 캐리어 두 개를 수하물로 보냈다.
그 과정에서 신분증과 얼굴 확인을 몇 번을 했나 모르겠다.
엄마 머리 팽팽 돌아가는 봤지! 하며 의기양양했는데 망했다.
남편이 이 사실을 알면 놀릴 거 같아 아이들에게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냥 내가 말했다. 자수는 광명의 지름길이다.
공항 주차장에 2박 3일을 세워둔 자동차의 주차비를 정산하니 6만 원이다.
하루 4만 원이라고 적힌 간판을 본 거 같아 12만 원이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래도 다행인 건가?
남편은 2박 3일에 대면 대충 4만 원 나온다는 거 같다며 그냥 주차장에 차를 넣고 가라고 했는데
결국 12만 원도 4만 원도 아닌 6만 원이다. 다음 여행 땐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그래도 내 차에 짐을 싣고 아이들을 태우고 핸들을 잡으니
비로소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김포에서 집까지 운전을 하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옆에서 쌩쌩 달리는 차들이 왜 이렇게 낯설지?
제주도에서는 최고로 낼 수 있는 속도가 70 정도였던 거 같다.
게다가 생각보다 많은 스쿨존에서는 속도 30을 지켜야 했기에 거의 엉금엉금 운전을 했다.
처음엔 좀 불편한 거 같았는데, 익숙해지자 운전이 엄청 편안했다.
김포에서 자유로 진입할 때까지 익숙하지 않은 길이라 온 신경이 바짝 곤두서 힘들었다.
내가 살던 곳은 이런 곳이었구나! 무서웠다.
그래도 무사히 자유로에 들어서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아이유의 '좋은 날'을 큰애와 함께 불렀다.
오로라 안 틀어준다고 부어터진 둘째는 모른 척했다. 많이 많이 들었다!
몇 주전 '나 혼자 산다'에서 박나래가 허니제이를 집으로 초대한 에피소드가 방송됐다.
엄마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본격 육아가 시작되면... 어느 순간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나 허니제이잖아!
할지도 모른다. 엄마로 살아간다는 건 그런 거다.
나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정말 미칠 거 같아! 그런 순간이 많았다.
고비를 넘기고 종종 넘어지고 실수하면서도 엄마로서 책임을 놓지 않은 건
다시 생각해도 정말 잘한 일이다.
이번 여행을 두 아이와 함께 하며 내 몸에서 저 두 아이가 태어나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아이들은 나보다 훨씬 아름답고 건강하다.
우리를 바라보는 식당 사장님들의 눈빛도 왠지 따스하고 흐뭇했다.
내 인생이 증명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옳든, 그르든 그냥 그랬다.
이 아이들이 모든 순간 날 사랑했다고 할 순 없지만(난 부족한 엄마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의지하고 많이 사랑하는 존재인 건 분명하다.
언제나 나를 걱정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같이 사랑하고 날 미워하는 인간을 몰래 째려보는 존재.ㅋ
그런 존재가 있다는 건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허니제이씨, 제가 깊이 사과드립니다. 당신의 정말 멋진 선택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