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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마치고

나의 멋진 나나야 안녕!

by 임지원

요즘 서머싯 몸의 '맥주와 케이크(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4)'를 읽고 있다.

오늘 막내가 미용실에서 컷을 하는 동안 아주 인상적인,

이 문장 나를 위해 쓴 거 아니야? 하는 부분을 발견했다.


'가끔 소설가는 자신을 신처럼 생각하고 작중 인물에 대해 모든 걸 이야기하려 들 때가 있지만,

반면에 작중 인물에 대한 모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는 것만 이야기하기도 한다.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걸 점점 더 의식하기 마련이니

작가가 경험으로 체득한 것 이상은 쓰지 않으려 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일인칭 시점은 이 제한된 목적에 한해 대단히 유용하다.'


서머싯 몸의 '맥주와 케이크'는 일인칭 시점으로 쓰인 작품이다.

마치 서머싯 몸이 내 옆에서 수다를 떠는 느낌이다.

혼자 낄낄대며 구구절절 문단과 작가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비판한다.

그렇게 아주 시니컬하게 서술해 나가다가 정작 자신이 멍청해지는 순간을 맞는데

노작가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그 순간 이 소설을 일인칭으로 서술한 것을 후회한다.

한참 시니컬하게 이놈 저놈 막 까면서 잘난 척(?)을 했는데,

갑자기 톤을 바꾸는 것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일인칭으로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다른 비평가의 생각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위의 인용한 부분은 그 내용 중 일부이다.

그 문장들이 (또) 내 가슴에 불꽃쇼를 펼치며 각인됐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일단 그 부분을 사진으로 남겼다.



내가 브런치에 쓴 글들은 대부분 나의 일상이 담긴 에세이, 당연히 일인칭이다!

그런데 에세이가 아닌 브런치북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하루키를 읽던 여자들 소설 하루키를 읽던 여자들 (brunch.co.kr)]이라는 소설이고

또 하나는 이번에 연재한 [나나는 그럭저럭 열두 살]이다.

그리고 이번에 깨달은 건데, 그것들은 에세이 아님에도 같은 일인칭 시점이라는 것이다.

나는 왜 일인칭 글쓰기를 벗어나지 못하나? 한계를 느끼고 있었는데

1874년에 태어나신 대작가 서머싯 몸께서 나에게 답을 주신 거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걸 점점 더 의식하며

경험으로 체득한 것 이상은 쓰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놀랄 일도 아니라는 것!


[하루키를 읽던 여자들]에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엄마로, 아줌마로 살아가며 느낀 걸 썼고

[나나는 그럭저럭 열두 살]은 하루키를 읽던 X세대 엄마의 초등학생 딸이

학교를 다니며 느낀 것, 생각한 것을 담았다.

엄마와 아이... 그게 바로 대략 20년 내가 경험으로 체득한 딱 두 가지였다.


"서머싯 몸 작가님, 저에게 깨달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경험하고, 가깝게 들은 걸 가지고 일인칭 글만 쓰는 게 놀랄 일이 아니라니,

마음이 편안해져요!"


그럼에도 나의 글쓰기가 딱 요만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조금은 슬프다.

용맹하고, 거칠고, 홀딱 깨는 저 안드로메다로 가지 못하는 이 새가슴. 부족한 상상력.

고작 엄마, 아줌마, 아이의 일상이 나의 우주, 딱 그만큼인 거 같아 서글프다.


아니다!


그래도 그 서글픔을 딛고, 내가 할 수 있는 두 편의 글을 완성했다는 것만으로

나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리고 다행히 나에겐 두 명의 딸이 있다.

먼 훗날 나의 딸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고,

서른마흔쉰... 나이 들어가고 언젠가 엄마가 곁에 없을 때,

내가 남긴 글로 위로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꼭 그러길 진심으로 바란다.



"우연아, 엄마를 위해 많은 그림을 그려줘서 정말 고마워!

나나는 그럭저럭 열두 살은 엄마와 우연이의 합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아마 이 글을 가장 많이 열심히, 재밌게, 읽은 독자도 우연이 일거야.

우연이가 나나의 일기로 즐거웠던 5학년, 행복한 열두 살을

오래오래 기억하길 바란다."


"우진아, 엄마 글 쓰라고 공모전 링크 보내줘서 고마워!

당선까지 됐다면 너무너무 드라마틱한 결말이었겠지만,

그거 생각보다 힘든 일인 거 너도 알지?

그래도 브런치북으로 남겨두었으니, 나중에 네가 딸을 낳고

그 아이가 열두 살이 된다면, 외할머니가 쓴 이야기라고 하면서 꼭 읽게 해 다오!

취준생으로 공부하느라 요즘 너무 외롭고, 힘들지?

취직, 그거 생각보다 힘든 일인 거 엄마가 잘 아니까!

마음 편안하게 할 수 있는 만큼 하자!"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착한 소녀들... 그럼에도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끼는

그 아이들에게 그 정도 마음 충분히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세상에 멋진 글, 인정받은 글, 품격이 넘치는 글이 넘치고 넘치는데

저의 작은 글을 단 한편이라도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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