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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와 달리기

동화 작가의 일기

by 임지원

오늘 오랜만에 헬스장에 갔다. 내가 뜸한 사이 고장 났던 러닝머신들이 새것으로 교체되었고, 계절도 바뀌어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솔솔 바람이 불어온다. 난 그 사이 새로운 러닝화를 장만했다. 2년 동안 열심히 달린 러닝화는 바닥이 딱딱해졌고, 오른쪽 신발 앞부분이 찢어졌기 때문이다. 바닥 두꺼운 양말을 신을 땐 발이 너무 꽉 끼는 느낌이었던 터라 새 러닝화는 기존 치수도 0.5mm 큰 걸 샀더니 발이 훨씬 편안하다. 오랜만에 뛰는 터라 처음엔 동작이 어색하고 힘이 많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나 오늘 마음먹었거든! 진짜 제대로 달릴 거야!! 했던 모양이다. 점점 힘에 부쳐 결국 속도를 줄이고 가볍게 달리려고 애를 쓰니 점점 힘이 빠지면서 달리는 게 수월해졌다. 오늘 기록은 6km, 46분. 중간에 잠깐 속도를 줄이고 물도 마시고 땀도 닦고 호흡을 가다듬었기 때문에 연속 달리기는 아니지만 꽤 좋은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뿌듯함을 느꼈다.


새벽 러닝을 하며 동화를 쓰던 지난겨울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름이 코앞이다. 이 좋은 러닝을 왜 오랜만에 했나? 후회가 밀려온다. 이유가 있긴 하다. 원고 쓰기와 운동 그리고 일상이라는 확실한 루틴이 있을 땐 러닝도 규칙적으로 했는데, 2월 중순 경 1~3권까지 원고를 출판 담당자에게 보내고 의견을 기다리는 동안 휴식과 자유를 만끽하다 보니 러닝이 제일 후순위로 밀려난 것이다. 더 더워지면 헬스장에 에어컨이 기지개를 켤 것이다. 그전에 충분히 달려놔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나의 첫 동화를 출판사와 계약한 이후 장편 동화 한 편 분량이었던 나의 동화는 점점 분량을 늘려 세 권, 시리즈가 되었다. 그리고 현재 4권을 쓰고 있으며 머릿속에는 5권이 굴러가는 중이다. 다섯 권 모두 출간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1권과 2권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고 아직 3권은 도장까지 찍진 않았지만 서면으로 출간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니 언젠가는 책이 되어 세상에 나올 것이다. 출판 계약 했다고, 축하 파티 했다고, 난리법석을 떨더니 왜 이렇게 조용한가? 싶으실 거 같다. 나도 이번에 알게 된 건데 어린이 책은 성인 책에 비해 공을 많이 들여 만들기 때문에 제작 기간이 오래 걸리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삽화 작가의 역할도 매우 크다. 대신 그만큼 책의 생명력이 길어 한번 나온 책은 오래오래 읽힌다고 하니 이건 작가에게도 분명 좋은 일일 것이다. 방송일 그만둔 지도 십 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번갯불이 콩 구워 먹는 방송국의 시간에 익숙한 건지 출판사의 느린 시간에 적응을 못하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무도 원고에 대한 압박을 하지 않는데 나 혼자 안달하며 스트레스를 받는 날 보면 한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그러다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나 정말 쓰는 사람 되고 싶었던 거 맞아?" 어떤 날은 쓰는 게 너무 행복하지만, 어떤 날은 쓰는 것만 아니면 다 재밌다. 이야기가 풀려갈 땐 하루 종일 스타벅스에 앉아 정신없이 쓸 때도 있지만 꽉 막혀 답이 안 나올 땐 하루 종일 청소를 하거나 오래 미뤄둔 약속을 해결하기도 한다. 그러다 책을 읽기도 하는데 책 속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갑자기 물꼬가 트이는 기적 같은 순간을 만나기도 하는데 며칠 전엔 박지리 작가의 '합 체'라는 작품을 읽다가 그런 경험을 했다. 정말 재밌고 발랄한 소설이었다. 그런데 맨 마지막 작가의 말을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렇게 재밌는 소설을 쓰신 대단한 작가님이 너무 빨리 하늘의 별이 되셨다는 게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그녀는 이 세상에 없지만 그녀의 작품이 계속 그녀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을 통해 박지리라는 작가의 모든 것을 충분히 느낀 거 같았다. 글을 써서 남겨둔다는 게 이토록 큰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니 지금 쓸 수 있음에 감사하며 더 신중하게 진심을 다하고 싶은 착한 마음이 생겼다. 11년 만에 어렵게 열린 작은 문인데, 벌써 쓰는 것만 아니면 다 재밌다니... 나 정말 혼나야 한다. 처음 출간 제안을 받고 도장 찍힌 계약서 받고, 쓰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음에 감사했던 순간을 떠올리자. 출판사의 시간에 익숙해져야 하고 일상을 영위하며 내 글을 써내는 나만의 속도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러닝 루틴을 회복해야 한다. 나한테는 달리기와 글쓰기가 짝꿍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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