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복한 가족이라는 유니콘
한창 새댁일 땐 집구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구구절절 글로 써 올려도 별로 부끄럽지가 않았다. 다이내믹한 부부싸움, 무능력한 엄마의 모습도 대충 귀엽고 봐줄 만했던 거 같다. 하지만 이젠 나이가 쉰을 넘겼고 그런 소리 해봐야 다 내 흠만 되는 거 같아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게 된다. 그러다가 눈빛과 마음이 따듯한 누군가와 수다를 나눌 기회라도 생기면 나도 모르게 툭 말을 던진다.
"우리 할머니가 대왕금쪽이 외아들(나에겐 아빠) 때문에 97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걱정을 못 놓고 사셨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걷기 힘들어도 새벽기도를 다니시고. 요즘 우리 할머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 많이 해요."
요즘은 다양한 가족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TV로 방영된다. (고딩엄빠나 금쪽같은 내 새끼, 결혹 지옥, 이혼숙려캠프 등) 그런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우리 집 이야기는 저 정도는 아니지 하면서 안도하다가도 막상 우리의 문제가 수면으로 올라오면 마음이 힘들고, 나는 왜 더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지 못했나 죄책감이 찾아온다. 가족이지만 각자 짊어진 삶의 무게가 다르다. 이십 대의 큰애는 나름의 고민과 갈등이 한가득이고, 십 대인 막내는 학업 스트레스와 그놈의 스마트폰!!! 뺏어도 보고 던져도 보고... 모르겠다 정말 저 무시무시한 걸 어떻게 해야 할지... 얼마 전 중학교 공개수업에 갔다가 오랜만에 만난 육아동지와 밥을 먹게 됐다. 그녀는 자녀 교육에 누구보다 진심인 지라 배울 점도 많다. 그리고 사교육 관련한 정보도 많이 갖고 있고 그 정보를 스스럼없이 나눠주는 고마운 지인이다. 나도 최근 학부모 강연회에서 들은 고교학점제에 대해 정보를 나눠주며 이런저런 수다를 막 떨다가 갑자기 우리의 수다가 어떤 지점에서 강렬한 합의에 이르렀다. "그놈의 스마트폰!" 내가 보기엔 그 집 아이는 거의 영재급으로 잘하는 아이인데도 스마트폰 때문에 1년 넘게 방황을 했다니... 자원 없는 우리나라에서 인재양성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놈의 스마트폰 때문에 아이들 정서도 지능도 다 망칠 거 같아 너무너무 걱정이 됐다. 그럼에도 그 골칫덩어리를 한 방에 뺏지 못하고 이렇게 질질 매고 있다. 나 혼자만 없다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 살기 힘든지도 알기 때문일 거다. 그나마 비밀번호를 오픈하고 종종 감시하면서 유지는 하고 있는데, 가끔은 또 저기서 뭔 일이 벌어지고 있나? 쓰나미급 불안이 밀려와 정신을 못 차리겠다. 그냥 국가 차원에서 자라나는 성장기 아이들, 청소년까지 스마트폰 보유 금지 법령을 만들면 안 되나?
늦둥이 낳고 가족 사랑 캠페인, 출산 장려 캠페인 모델이라도 된 듯 행복하게 웃은 적도 분명 있었는데, 그토록 깜찍했던 귀염둥이가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서늘하고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다. 성장통인가? 스마트폰증후군인가? 모르겠다, 모르겠어... 그뿐인가 이제 다 커버린 큰 애는 엄마의 잔소리가 들어갈만한 여지도 주지 않는다. 예민한 두 아이, 도자기 같은 두 아이... 주말에 이 두 아이를 상대하며 내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지쳐있었다. 엄마로서 품위 있게 잘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오래전에 사둔 책인데 여태 못 읽다가 요즘 펼친 책이 있다.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깊은 상처를 갖고 있는 두 명의 여성이 행복해지기 위해 지독하게 몸부림치는 과정이 담겨 있다. 한 장 한 장... 어떤 부분은 낭독을 하면서 나에게도 있는 그 비슷한 상처들을 어떻게든 치유해 보려고 노력하며 읽었다. 드디어 마지막 장 페이지를 읽고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나는 지금 내가 받은 상처를 딸들에게 물려주고 있다. 자괴감, 죄책감, 무력감이 한순간 몰려왔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젠 그러지 말자고 다짐을 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매일 하하 호호만 하면서 살 수가 있나? 눈앞에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아이를 보면 속이 터지고, 잘못된 길로 막 걸어가는 걸 보면 잡아 세워서 혼을 낼 수밖에 없는데 이 예민하고 고고한 도자기는 바늘 하나 꽂을 구멍도 안 내어준다. 자식 키우는 일이 쉬울 리가 있나... 힘들어 죽겠는데, 남편은 이런 날 응원하기는커녕 이 모든 문제가 다 엄마인 나 때문이라는 듯 날 바라보며 한숨을 쉰다. 그의 눈빛은 이렇게 말한다. 한심하다 한심해. 엄마가 똑바로 해야지! 딸들한테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나한테만 호기를 부린다. 저 놈의 가부장 DNA.
지난주 현충일 연휴엔 막내만 데리고 강릉 여행을 다녀왔다. 종일 줄이 길게 서 있는 경포대 근처 순두부집도 가고, 대기번호 543번이라는 놀라운 번호표를 받고 기다려 물회를 먹었다. 그 물회 식당 계단에 배우 정해인 사진과 싸인이, 벽마다 달린 모니터엔 유명 먹방 유튜버의 영상이 계속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이렇게 맛있는 걸 다정하지도 않고 공감능력도 없는 남편이랑 둘이 다니면서 먹는 것보다는 그래도 느지막이 낳은 막내가 있어 같이 다닐 수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종종 아빠에게 선 넘는 장난을 치는 막내의 모습에서 우리 가족이 모던한가? 화목한가? 생각도 해보고. 지금은 나를 넘어서는 덩치가 된 막내가 고작 7개월 만에 핏덩이로 태어나 우리 속을 끓였다는 사실이 신화였나? 전설이었나? 기억이 가물가물... 그래 이만하면 잘 살고 있어 괜찮아! 감사하자! 했는데, 그 또한 잠깐 든 교만한 생각이었나 보다. 겸손하자. 우리 집 행복한 가족이에요! 광고할 필요도 없고, 행복했다가 또 금방 쑥대밭 되는 게 가족의 본질이라는 거 모르는 사람도 없고, 그래도 종종 행복한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니 허둥대다가 놓치지 말고 잘 챙겨서 만끽해야 한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도자기를 깨트리면 안 된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