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경이로운 신문물
중2인 막내의 공개수업에 다녀왔다.
과목은 미술. 요즘 아이들은 미술 시간에 무엇을 하나? 그림을 그리려나? 미술사를 배우려나? 설레는 마음으로 앉아 있는데, 미술 선생님이 본인 키 높이 정도의 컨테이너 박스를 끌고 교실로 들어온다. 박스 한 면의 양쪽으로 열리는 문이 있는데 그 문을 여니 노트북들이 칸칸이 꽉 들어차 있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컨테이너 박스 앞에 줄을 선다. 그리고 차례로 자신이 사용할 노트북을 챙겨서 자리로 돌아간다. 아이들이 모두 착석하자 선생님은 지금부터 쳇 GPT를 이용해 그림 작품을 소개하는 숏츠를 만들 거라며 설명을 시작한다. 아이들은 늘 하던 것이라는 듯 자연스럽게 노트북을 책상에 놓고 조용히 작업을 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손을 들라고 하자 몇 명이 손을 들고, 선생님은 손을 든 학생에게 다가가 설명을 해준다. 조금은 소란스러운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갔다. 나를 포함 세명의 엄마는 어딜 봐야 하나? 눈 둘 곳을 찾다가 결국 내 아이가 뭘 하고 있나 유심히 바라본다. 수업이 거의 끝나갈 즈음 한 학생이 숏츠를 완성했다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선생님이 교실 앞 왼쪽 천장에 매달린 TV를 이용해 학생이 만든 숏츠를 보여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설명하는 숏츠였다. 와... 이런 거구나. 내가 유튜브를 통해 본 숏츠들이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깜짝 놀랐다. 이미지를 선택하고 멘트를 작성하면 AI가 알아서 내레이션 더빙까지 해준다. 띄어있기, 호흡까지 완벽하다. 성우가 없는데 목소리가 있다니... 그것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그냥 유능한 인간의 목소리 같았다.
큰 아이 낳고 기업인 대상 온라인 교육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을 했었다. 그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성우 더빙하는 날은 어마어마하게 신경이 곤두셨다. 워낙 많은 양이라 하루 종일 녹음실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된 노동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스트레스는 혹여 녹음이 잘못되면 진짜 큰일 나는 거였다. 녹음실도 다시 대여하고 성우분까지 다시 불러야 하기 때문에 오류, 실수는 곧바로 엄청나게 큰 비용 지출로 이어졌다. 책임감이 어마어마했던 기억... 기도를 많이 했다. 오늘 공개수업을 보며 진심으로 쳇 GPT와 AI에 경의로움을 느꼈다. 세상이 달라지고 있구나. 내가 알고, 경험한 걸 아이들에게 적용하면 안 될 거 같은데... 그렇다고 모든 결정권을 아이들에게만 줄 수도 없으니, 결국 내가 공부를 하고 알아내야 한다는 건가? 아휴.. 골치 아파. 어쨌든 이런 게 과학이구나! 정말 놀라웠다.
지난 현충일 연휴에 떠난 강릉 여행은 남편과 나 그리고 막내, 이렇게 셋이 다녀왔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존재감 있는 뭔가가 함께 한 느낌이 들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준 그 무엇. 바로 자동차의 크루즈 기능이다.
*크루즈 기능은 운전자가 액셀을 밟지 않고도 일정 속도를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기능 즉, 크루즈 컨트롤(Cruise Control)이라고도 불리며, 고속도로처럼 장거리 운전이나 피로가 쉽게 쌓이는 도로에서 운전자의 피로를 덜어주고 연비 효율을 높여줍니다. (AI가 알려줌)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한두해 탄 것도 아니고, 뭔가 브레이크를 밟는 느낌이 달라진 거 같아 이상했다.
남편이라면 이 정도에 브레이크를 밟을 거 같은데 조금 더 빨리 밟는 느낌, 뭐지?
막히는 구간에서 남편의 짜증이 좀 덜한 거 같은 이 느낌 뭐지? 뭐지?
고속도로에 진입하면서 왠지 모르게 남편의 표정이 아주 흥미롭고 즐거워 보이는 거다. 뭐지????
"이거 혹시... 그거야? 내가 절대 하지 말라는 그 거."
"응. 아까부터 크루즈로 가는 거야."
"미쳤나 봐! 이렇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데... 우리 가족 세명의 목숨을 이 쇳덩어리 자동차한테 맡긴다고?"
"괜찮아 요즘 고속도로 탈 땐 크루즈로 다녔어. 놀라워."
어쩐지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여행인데 선뜻 따라나선 것도 이상했다.
(난 이런 여행을 남편 없이 아이들만 데리고 다녔다.)
심지어 장거리 여행을 갈 땐 하이브리드인 내 차를 가지고 가는 편인데 본인 차로 직접 운전까지 한다길래 아주 이상했는데, 이유가 있었던 거다.
"믿을 수 있는 거야? 아니... 오작동할 수도 있잖아. 그럼 우리 죽는 거 아니야? 나 오래 살고 싶은 거 알지? 아직 쓰던 동화 출간을 못했는데... 불안해서 잠도 안 와!"
"아까 쿨쿨 잘만 자더구먼..."
잠시 후 고속도로 위에 달린 거대한 전광판에 이런 문구가 뜬다.
[크루즈 사용 시 전방주시할 것]
도대체 크루즈 기능을 사용하는 운전자가 전체 운전자의 몇% 나 되길래 저런 문구가 나오는 건지 신기하고 놀라웠다. 난 아직 적응을 못했는데 벌써 일반적인 기능이 된 건가? 크루즈 기능이 차에 있다면 그 기능을 사용하는 건 불법이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운전자가 브레이크와 액셀을 밟지 않고 운전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 속도가 100, 110을 넘기고 자동차가 막 질주를 하는데 내 발이 놀고 있다고? 나는 겁쟁이라 이런 상황에서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는 못 배길 거 같다. 그래도 남편의 편안한 얼굴을 보니 더 이상 잔소리를 해봐야 먹힐 거 같지도 않고 그냥 기도만 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그러다 이번엔 전광판에 이런 문구가 뜬다.
[크루즈 사용 시 주의 집중. 맹신하면 대형사고의 원인]
"거봐! 거봐! 대형사고 원인이래!!! 실제로 대형사고도 났었나 봐!!!"
"전방주시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 내가 잠을 자거나, 아예 딴짓을 하는 거 아니잖아. 바로 내가 브레이크 밟으면 차가 바로 멈춰"
불안과 걱정을 내려놓지 못한 채 강릉에 도착했다. 다음 날 이곳저곳을 다니면서도 계속 크루즈 생각만 했다.
"지금 이 브레이크 크루즈가 밟은 거야?"
"응."
"이것도?"
"응응"
"엄마 크루즈 생각 좀 그만해! 바다 봐 바다 좋다!"
"넌 안 무서워"
"별로"
...
그러다가 점점 크루즈의 보수적인 브레이크에 익숙해지며 난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운전하며 짜증 내던 남편 꼴 안 보는 거 그게 제일 좋다! 휴게소에 도착할 때마다 힘들었다고 피곤하다고 공치사 공치사.
"어? 이 브레이크 크루즈 아니고 오빠가 밟은 거지?"
"어어 고속도로에서 IC로 빠져나갈 땐 직접 밟아야 줘야 해. 이거 되는 차도 있데. "
"어쩐지 크루즈 브레이크가 훨씬 안정적이야. 크루즈는 이쯤에서 밟았을 텐데."
"참나..."
약 올라하는 남편을 보니 웬일인지 속이 풀린다. 크루즈 덕분에 강원도 여행을 자주 올 수 있을 거 같다.
정말 놀라운 신문물이다. 더 놀라운 건 내가 이틀만에 적응했다는 거.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