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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작가 Feb 05. 2020

엄마의 등  

 엄마가 움직이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아침 여섯 시였다. 늦은 시간에 잠들어서 아주 피곤했지만 분주한 틈에서 혼자 누워있을 수는 없었기에 몸을 일으켰다. 고기를 굽고, 잡채를 볶고, 떡국을 끓였다. 명절에 특별히 어딜 가지 않는 우리 집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던 집에서 제사를 지냈다. 집을 팔기로 했었기 때문에, 할머니 댁에서 지내는 마지막 명절이었다. 딱히 도움되지 않는 딸이었지만 적당히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어 있는 듯 없는 듯 돕고 있었다. 그때 보았다. 엄마가 훌쩍이는 것을. 설거지를 하면서, 음식을 담으면서 내내 눈물을 참아내고 있었다. 그 전날 엄마랑 새벽에 긴 얘기를 나눴던 터라, 혹시 내 얘기가 아직도 마음에 남아서일까, 하는 마음에 아는 체하지 않았다. 게다가 '엄마 울어?'라는 식의 멋없는 얘기밖에 할 줄 모르는 난, 굳이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한 20년 정도 됐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 한 아파트 단지 내에서 산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엄마 손을 잡고 이사 갈 집을 둘러보러 왔던 것이. 할머니 댁은 앞 동이었다. 그 아파트에서 유년시절을 지나 첫 회사를 퇴사할 때까지도 지냈다. 등굣길에, 출근길에, 친구 만나러 나가는 길에 할머니, 할아버지를 마주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어리석게도 그게 영원할 거라고 여겼다. 4년 전 12월의 마지막 날. 앞 동에 사는 게 무색할 만큼 언제 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은 채로 할머니와 영원히 이별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자연스럽게 할아버지를 모시고 지냈다. 처음에는 49일이 지날 때까지 만이라도 있어야 될 것 같다고, 그러다 조금 더 있어야 될 것 같다고. 그 후에는 더 묻지 않았다. 길게는 일주일에 한 번, 짧으면 이틀에 한 번씩 엄마를 보게 됐다. 그렇게 나와 아빠는 우리 집에, 엄마는 할머니 댁에서 지냈다. 그리고 작년 1월 2일. 촛농이 녹으면 초가 꺼지고, 봄엔 나무가 푸르러지고, 겨울엔 살아있는 것이 숨어버리듯, 그런 순리처럼 할아버지와도 이별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엄마는 굳이 집으로 오지 않았다. 아빠와 나도 엄마 없이 지내는 생활에 꽤 익숙해져 있었다. 엄마가 부재함으로써 집안일들 중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 늘어갔고, 부끄럽지만 이십 대 후반에 그것들을 배워가고 있었다. 과일 깎는 것도 포함해서였다.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20년이 담긴 곳의 흔적을 천천히 지워내고 있었다. 할머니가 입었던 비싼 옷들은 엄마가 평소 잘해드렸던 청소 하시는 아주머니에게 드렸고, 할아버지 옷은 차곡차곡 쌓아서 버렸다. 같은 아파트 주민들은 할아버지가 요즘 통 안 보이신다고 묻기를 조심스러워하다가, 종종 '할아버지는...'이라며 엄마에게 말을 건넸다. 그건 작년 12월까지도 그랬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도 일 년을 옆에 계셨다. 엄마는 그 잔상들이 이번 설이 지나면 완전히 사라진다고 생각한 것일까. 엄마는 울었다. 절을 하면서 한참을. ‘죄송해요 이렇게 살아서...’라며 울었다.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끝까지 멋없는 난 눈물을 참으며 엄마의 등을 바라봤다. 사실은 ‘이렇게’ 산 게 아니라, 엄마는 잘 살았다고, 그동안 마음이 많이 약해진 엄마 등을 토닥여 주고 싶었다. 그렇게 제사를 마무리하고 가족들과 엄마가 해준 설날 음식을 먹었다. 할 수 있는 건 그릇을 나르고 설거지하는 것뿐이었다. 그냥 뒤에서 바라만 보는 무뚝뚝한 딸이지만, 오랫동안 엄마 등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쓰러지면 내가 언제든 받아주겠다고, 절대 땅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것만큼은 꼭 지키겠다고 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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