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처음 명절을 맞이했을 때의 기분을 잊을 수 없다. 단 한 번도 명절과 가족을 떼어놓고 생각해 본 일 없었고, 그런 역사도 없었기 때문이다.
쉴 틈 없이 읽어 내려가는 인생의 한 문단 두 문단 뒤 나타나는 큰 챕터, 이제 잠깐 쉬어가도 되겠구나, 책갈피를 꽂아놓고 만나러 가는 우리 가족의 시간.
갑자기 책갈피를 꽂아 두어야 할 챕터가 사라져 버렸다. 그대로 다음 장을 넘기기에는 이미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진 집중력이다. 갈 곳을 잃고, 할 일 없이 손에 잡혀 있는 책갈피가 강조하고 있는, 30년 동안 한껏 습관이 되어진 떠들썩하게 특별한 날.
아, 이게 혼자란 거구나. 이런 적막함이 혼자였던 거구나. 이제부터는 타지에서 맞는 명절이라도 책갈피를 쓰기로 한다. 한 번 당하지, 두 번은 당하지 말자는 진취적인 마음으로 미국에서의 명절을 쇄보기로 한다.
음식으로 참 행복해지기 쉬운 먹보의 마음, 설날에 꼭 먹어야 할 명절 음식 리스트를 뽑아본다. 혼자라도 혼자임을 까맣게 잊고서, 코미디 영화를 낄낄 웃어대며 볼 수 있을 것 같은 음식이어야 한다.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이 즐거웠으면 좋겠다. 오색꼬치다. 이 녀석-음식을 사랑해서 의인화를 자꾸 하게 된다-만 있다면 틀림없이 마음이 즐거워질 것 같다.
오색꼬치를 만드는 동안은 엄마생각, 명절음식을 만들던 엄마를 도와주던 생각, 여동생과 꼬치를 함께 끼우던 생각, 꼬치를 끼우던 동안에 한편에서 동그랑땡을 빚고 있었던 할머니 생각, 꼬치를 꼽을 나무꼬치가 다 떨어져 남동생에게 슈퍼에 좀 다녀오라고 했던 생각, 간을 좀 보라며 아빠 입에 뜨거운 꼬치를 넣어주던 생각, 싫다고 손사레를 치면서도 늘 맛있다고, 엄마 손맛이 최고라는 후한 맛평가를 했던 아빠 생각, 갓 만든 전에 꼭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시던 할아버지 생각, 할아버지의 막걸리 잔을 두 손 모아 채워드렸던 생각, 오색꼬치가 딱이다.
손이 제법 많이 가는 것조차 좋다. 그래야 명절음식 같지. 설날이라면 떡국은 꼭 만든다. 우리집은 닭떡국을 만들어 먹었다. 그래서 닭떡국을 준비한다. 닭떡국의 포인트는 닭고명이다. 이 고명을 어떻게 양념하느냐에 따라서 맛이 좌우된다. 엄마는 닭고명이 짭조름해야 닭떡국이 맛나다고 했었다. 다진마늘, 쪽파, 참기름, 통깨, 집간장을 넣고 조물조물 버무려 참으로 맛깔났다. 옆에서 조수 노릇이나 했던 내가, 우리집 메인 쉐프가 담당했던 닭고명을 이렇게 버무리고 있다.
에라이, 하는 김에 몇 가지 전 종류도 부쳐본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니 힘든 줄도 모르겠다. 가족과 친구에게 한나절 동안 만든 명절음식을 사진으로 보낸다. 와, 아주 사서 고생을 하는구나. 한국보다 더 명절 같다. 한국 어디 숨어서 만들었니. 하나같은 반응들에 멋쩍은 웃음이 난다. 그렇지만 특별한 날의 책갈피는 크게 방황하는 일 없이 큰 챕터 사이에 얌전히 꽂혀 있다.
시간을 들여 만든 명절음식에는 막걸리나 복분자주 같은 우리술을 곁들인다. 한국마트에서 어렵게 공수한 술이니 특별한 날에 딱이다. 전을 여러 종류로 부쳐두길 잘했다. 안주로 이렇게 제격이니 말이다. 아, 이 버섯부침은 아빠가 술안주로 참 좋아하겠다. 방심한 사이,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는 얼굴들.
이왕 판을 벌였으니, 일부러 좀 많이 만들어 남은 꼬치와 전들은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비닐랩에 꽁꽁 싸서 냉동실에 넣어둔다. 내 모습에서 엄마가 겹쳐 보인다. 조금만 만들지, 왜 이렇게 많이 만들어서 이래. 엄마가 안쓰러운 마음에 괜히 툴툴거렸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넣어 두었다가 생각날 때마다 한 뭉텅이씩 꺼내먹는 행복이 꽤 크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찬 공기 사이에 섞인 익숙한 냄새. 집 안에 남아 맴도는 전 부친 기름 냄새, 명절 아침 냄새.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따뜻한 추억들이 순서도 없이 왈칵 몰려와 눈물이 찔끔 난다. 냄새의 기억이 가장 강렬하다더니.
모닝커피를 내려야 하는데 명절 냄새가 사라질까봐 잠깐 멈칫하다, 이내 즐거운 마음으로 커피를 내린다. 따뜻한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호록, 가족과의 명절 밥상 추억으로 충만해진 어느 명절날 미국에서 맞은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