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린숲 Sep 10. 2019

미국에서 만난 한식의 맛


먹다 남은 김치를 싸달라고 말하는 날이 올 줄이야.


미국에 살면서도 한식을 잘 해 먹는다. 그냥 잘해 먹는 것 보다 더 잘해서 먹는다. 고추장, 된장, 간장, 한식의 기본 장은 웬만해서는 떨어질 일이 없다. 고춧가루도 인터넷을 통해 한국마트에서 주문하여 칼칼한 국물맛을 포기하지 않았다. 육수도 소고기와 멸치 조미료로 어찌어찌 대체해 아쉽지 않을 정도로 맛을 낸다. 고추는 약간 신맛이 나는 할라피뇨 대신 청양고추와 비슷한 맛이 나는 세라노 고추를 쓴다. 


매주 장을 볼 때는 한 주 동안 만들 요리를 계획하고 신중하게 식재료를 선택하는 편이다. 요리는 대부분 한식이다. 된장찌개가 먹고 싶으면 애호박과 비슷한 초록 쥬키니를 산다. 여기에 감자와 세라노 고추, 감자를 썰어 보글보글 끓이면 한국에서 먹던 된장찌개와 다름이 없다.


시원한 바지락국이 먹고 싶으면 냉동 조개를 산다. 고추와 후추로 칼칼한 매운맛만 내면 나머지는 조개 육수가 해결해 준다. 홍합탕도 마찬가지다. 남은 국물에는 라면사리를 넣어 한 번 더 끓여 먹는다. 라면사리에 벤 짭조름한 조개 육수의 감칠맛에 매번 감탄을 하며 먹는다. 미역국도, 고추장찌개도 마찬가지다. 한국 조미료와 기본 채소가 있으면 얼추 맛을 낸다. 


카레도 자주 해서 먹는다. 미국에는 한국 브랜드 카레 보다 일본식 고형카레가 좀 더 대중적으로 구하기가 쉬워 고형 카레를 사용한다. 여기에 자메이카 커리 파우더를 살짝만 넣으면 일본 카레에 살짝 아쉬운 매운맛이 더해진다.


오히려 불고기나 삼겹살 같은 고기요리가 의외로 ‘그 맛’을 내기가 어렵다. 정육 과정부터 한국과 미국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불고기용 소고기와 얼추 모양이 비슷하게 얇게 슬라이스되어 나온 고기를 사보지만 지방함량부터 굵기까지 차이가 많이 나다보니 아쉬운 마음이 든다. 삼겹살도 마찬가지. 삼겹살이 먹고 싶은 날에는 ‘컨츄리스타일’이라고 정육된 돼지고기를 주로 산다. 지방과 살코기가 적절하게 어우러져 있고 육즙도 풍부하지만 삽겹살은 아니다.




나름 한국 음식도 잘 해 먹는다고 자부하면서도 결핍은 또 다른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먹고 싶은 한국음식을 제때 먹지 못하는 것도 결핍이고, 한국음식을 위한 재료를 고민하고 대체하는 과정도 결핍이었다.


오랜만에 한인 타운에서 만난 한식당에 그야말로 눈이 돌아간다. 이게 이럴 일이야, 예상하지 못했던 폭주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한국에서 잘 주문할 일 없는 김치찌개가 그날의 원-픽. 외국에 나가면 그렇게 김치, 김치 한다더니, 내가 정말 그렇다. 등갈비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등갈비보다 김치가 푸짐했으면 했는데, 고기가 더 많아 순간 시무룩해졌다. 고기가 많아 시무룩해지다니, 이런 날도 있다. 



한국에서 먹던 김치찌개보다는 깊은 맛은 덜한 것 같지만, 매콤하고 묵직한 김치찌개다. 행복이란게 별거 없지. 원초적인 행복감에 빠져 음미해보는 김치찌개의 맛. 김치찌개에 코를 박고 반쯤 해치우다 보니, 반찬이 동이 났다. 한식하면 반찬이지. 반찬 좀 더 주실 수 있으세요? 직원이 미소로 답하며 푸짐하게 리필해 준다. 김치와 숙주나물, 무장아찌다. 이렇게 맛깔날 수가 없다. 


김치찌개를 먹다 보니 김치에 손이 덜 가 리필받은 김치가 조금 남아버렸다. 정말 조금 남았다. 한국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남은 김치에 힐끗힐끗 눈이 간다. 조급해진다. 직원들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도저히 그냥 두고 갈 수 없는 김치. 


“저, 저기, 요 남은 김치 좀 싸갈 수 있을까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와 공손함으로 부탁을 해본다. 직원은 으레 있는 일인 듯, 작은 포장용 박스를 건네준다. 그래, 미국에 있는 한식당에서 나 같은 한국인이 처음일 리가 없지. 다행이다.


포장박스에 담은 김치를 보물단지 마냥 쥐고 쫄레쫄레 식당을 나왔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려는데 미쳐 비닐봉지에 담지 못한 김치박스에서 냄새가 새 나온다. 나에게는 맛있는 냄새지만, 생소한 사람에게는 강한 냄새일 수 있고 카페에서 음식냄새는 실례인 일이다. 황급히 봉지를 하나 얻어 꽁꽁 싸맸다.


그렇게 모셔온 김치는 며칠 지나 양배추를 더 썰어 넣고 양을 불려 부대찌개로 끓여 먹었다. 피시소스를 넣어 감칠맛을 더해 본다. 며칠 사이 김치가 익어 새콤해졌다. 나박김치와 배추김치가 함께 들어가 깊은 맛이 난다. 남은 김치 싸오길 잘했지, 잘했어. 고개를 끄덕끄덕, 신명나는 김치찌개 잔치 2라운드. 





매거진의 이전글 미국에서 맞이한 명절 밥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