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린숲 Jul 17. 2020

미국 집콕생활, 웰컴투 2인 예약 다이닝룸

애런이 재택근무를 시작한지도 5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집이 사무실이자, 식당이자, 놀이터인 나에게 직장동료가 한 명 생긴 셈이다. 


프리랜서 생활 연차도 이제 금방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꽤 오랫동안 이어오고 있다. 애런과 집에서 함께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것들. 첫 번째,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 게 아니라 버텼다는 것. 두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만의 시간은 필요하다는 것. 세 번째, 애런과 나는 정말 잘 맞는 인생의 동반자라는 것.


원래의 일상은 이렇다. 아침에 일어나 조깅을 하러 나가면서 애런에게 굿바이 인사를 한다. 운동하고 들어오면 애런은 출근을 하고 없기 때문이다. 가끔 내가 운동을 끝내고 집으로 들어가는 시간과 애런이 출근하는 시간이 겹쳐 밖에서 만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면 서로 정말 반갑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샤워를 하고 커피를 내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오후 1시까지 일을 한다. 식사는 차려 먹는 편이지만, 요리 스킬이 늘어서 요리를 하고 식사까지 끝마쳐도 1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오후 2시부터 다시 일을 한다. 일이 없는 날도 많지만, 그렇더라도 뭐라도 한다. 오후 5시, 일을 끝내고 애런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우리는 가사 일에 역할분담이 확실한 편이고, 나는 애런을 위해 효율적으로 요리를 하는 것이 좋다-애런의 다이어트 식단과 나의 식단은 완전히 달라서, 나는 저녁 식사를 위해 보통 2가지 요리를 한다. 애런과 나는 각자 컴퓨터 앞에서 보고 싶은 것을 보며 따로따로 식사하는 것을 좋아해서 그렇게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 일말의 불만이나 섭섭함이 없다. 


보통 애런이 출근을 하고, 내가 집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은 오전 7시 반부터 오후 6시 반 정도. 외로움과 고독함이라는 것은 나도 모르게 서서히 나를 장악하는, 해 질 녘,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 같은 것이다. 떨쳐 내고 싶어도 떨어지지 않고, 어느새 짙은 어둠이 되어 내려앉아 있다. 나는 내 기분을 잘 살피는 편이고 뭘 하면 그림자를 떨쳐 낼 수 있을지도 알고 있어서, 그런 기분이 찾아올 때마다 대부분은 잘 극복했다. 일하고 싶을 때 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쉬고 싶을 때 쉬는 내 생활에 만족하고 감사했지만, 어찌 되었건 그런 기분은 찾아온다.




이랬던 일상이 애런이 재택근무를 시작하면서 미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일단, 애런과 꼭 붙어 집콕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그런 기분이 찾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아주 작은 변화도 예민하게 감지한다. 긍정적인 변화이건, 부정적인 변화이건 간에, 서로의 안부를 하루에도 몇 번씩 주고받는다. 우울한 마음을 나누어 함께 해치우고, 기쁜 마음은 나누어 두 배로 기뻐한다. 애런과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도 다투는 일이 없다. 하루종일 붙어 있으면 답답하고 다툴 일도 많을 줄 알았지만, 그러지 않아서 내심 다행이었다. 


가장 달라진 점은 식생활이다. 먹는 것에 큰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는 나는 유혹에도 쉽게 넘어간다. 애런이 출근하면, 아침 식사로 라면 두 개를 먹고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늘어져, 그날 하루를 포만감과 더부룩함으로 보낸 적도 종종 있다. 라면은 나의 소울푸드이자 필요악 같은 것.


그렇다. 집에 있는 애런 때문에 아침 댓바람 라면 두 개는 하지 않게 됐다. 다이어트를 위해 유혹을 참아가며 식단관리를 하는 애런 옆에서 아침부터 라면을 끓이는 무신경한 아내는 되고 싶지 않다. 스스로도 혐오하는 이런 종류의 무분별한 식생활 말고도, 하루를 통으로 날려보는 무기력한 게으름을 마음껏 펼칠 수 없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혐오하고 싫어하지만, 가끔은 필요한 일이다. 태어난 김에 살고 있는 것 같은 미물이 된 다음 날에는, 만회하기 위한 행동력을 타고 삶이 좀 더 활기차 지곤 한다. 나도 그렇듯 애런도 그렇지 않을까.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마음껏 보내보고 싶지는 않을까. 


집에서 하루 세끼를 함께 먹어야 하는 우리는 매번 장을 보러 가기 전에 메뉴를 상의하고 쇼핑리스트를 만든다. 이럴 때마다 나는 늘 식당 오픈을 앞둔 메인 셰프가 된 기분이다. 쇼핑리스트에 있던 재료의 상태가 안 좋으면, 과감하게 다른 재료로 대체한다. 그날 신선한 재료를 선택하는 것이다. 나는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를 낭비하는 일이 거의 없는 꼼꼼한 셰프다.


아침은 커피와 바나나, 요거트 같이 간단한 것으로 한다. 저녁은 요리 시간을 여유롭게 쓸 수 있어서 상관없지만, 일 사이에 해결해야 하는 점심이 문제다. 서로 식단이 다른데 점심을 어떻게 통일시켜야 하나. 결국엔 내가 애런과 함께 건강식을 하게 되는 일이 많아졌다. 애런과 완전히 같은 메뉴는 아니지만, 식재료가 같아서 자연스럽게 건강한 점심을 먹고 있다. 예를 들면, 비빔밥 같은 경우 애런은 탄수화물을 최대한 줄인 비빔밥을 주고, 나는 그냥 비빔밥을 먹는 것이다. 비빔밥은 어찌 되었건 채소가 많이 들어가서 밥을 적게 먹게 되는 건강식이다.



일이 없는 날에는 점심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곤 한다. 건강식을 최대한 함께, 맛있게 먹기 위해서다. 얼마 전에는 근사한 스시롤과 월남쌈을 만들었다. 알록달록한 채소들을 채썰어 준비하고, 틸라피아와 닭가슴살을 구웠다. 애런에게는 틸라피아와 채소를 돌돌 말아 만든 스시롤을 주고, 나는 닭가슴살을 넣은 월남쌈을 먹었다. 애런과 점심식사를 함께 하지 않았다면 절대 평일 점심에 나올 수 없는 메뉴다. 


가장 기다려지는 날은 애런의 치팅데이다. 애런이 목표 체중 감량에 성공하면, 우리는 벼르었던 메뉴를 함께 먹는다. 최근에는 오레오치즈케이크와 치즈파니니를 만들었다. 평소 애런은 요리를 즐기지 않지만, 인터넷을 보다가 흥미로운 메뉴를 발견하면 호기심 때문에 늘 새로운 요리에 도전하곤 한다. 호기심이 널 파멸할 거야, 내가 농담처럼 애런에게 하는 말이다.



애런은 오레오치즈케이크를 꼭 만들어야 했다. 애런이 결정한 요리는 애런이 메인셰프, 내가 주방보조가 된다. 오레오치즈케이크는 간단한 레시피였지만,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스트레스가 심한 편인 애런에게는 힘든 과정이었다. 파우더 설탕이 필요한데 일반 설탕밖에 없었다거나, 바닐라익스트랙을 생크림과 함께 휘핑해야 되는데 깜빡해서 마지막에 넣고 휘핑했다거나 하는 과정에서 일일이 낙담을 했다. 어쨌든 오레오치즈케이크는 대성공이었다.


치즈파니니는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에서 먹던 메뉴다. 요즘 카페를 갈 수 없게 되자, 내가 한 번 집에서 도전을 해봤는데, 생각보다 정말 맛있게 나와서 그 뒤로 자주 만들어 먹고 있다. 키포인트는 치아바타와 그릴팬이다. 이 두 가지는 맛있는 파니니를 위해 꼭 필요하다. 통통한 치아바타를 그릴 팬에서 꾹 눌러가며 구우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치즈파니니가 완성된다. 


오늘의 점심은 토마토페이스트에 버무린 콜리플라워 채소볶음이고, 저녁은 오이샐러드가 될 거야. 내가 메뉴를 공지하면, 애런은 늘 고마움을 전한다. 매번 처음인 것처럼 고마움을 표현하기에, 나도 항상 자부심 강한 셰프로 있을 수 있다. 한 입 먹고는 매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이런 손님이라면, 다이닝룸 예약 손님으로 언제나 대환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국 집콕생활, 냉장고파먹기는 힐링푸드가 되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