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하고 무능력한 대표는 도망치는 것 말곤 할게 없습니다.
2021년이 4시간 15분 가량 남은 지금. 나는 제주로 도망와있다. 와인은 두병이 있고, 맥주는 두캔이 있다. 블랙 올리브가 한 접시 가득 있고, 애플 크럼블은 다 먹어 없으며, 초코 케이크가 조금 남았다. 얼마만인지 모르겠는데, 화장실에서 본 얼굴이 벌겋다.
다 때려치라고 하는 듯 했다.
올 한해 많은 일이 있었다. 있었을 거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데, 제주에 온지도 벌써 4일째 인데, 여태 2021년을 되돌아보는 일을 하지 않았다. 아마 피한거겠지. 서울로부터 도망친 겸 해서 내가 해야하는, 하고 싶은, 그 모든 일로부터까지도 도망을 친거 같다. 머리로는 몇번씩이나 글을 썼다 지웠다. 책상 앞에 앉았다 일어섰다.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을 들어다 놨다 했지만, 정작 실제로 한건 별거 없다.
믿지도 않는 신이, 하나님이, 아니면 하느님이, 아니면 부처님이, 다 때려치라고 하는 듯 했다. 2021년 12월. 한국 나이로 29살인 올해 12월, 그랬다. 사무실이 있는 건물은 갑자기 건물 주가 부수고 다시 짓는다고 했고, 정부 지원금은 예정대로 끝날 예정이었고, 2년을 간당간당 버텨온 통장 잔고는 진짜 정말로 너무나 오랜만에 0원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이 와중에 나이 스물 아홉에 겨우 처음 시작해본 연애까지도 수백번 예고했던 끝이 드디어 진짜 다가왔다고 울부짖었다. 그러니 그만두고 싶을 수 밖에. 전부 다 때려치고, 리셋하고 싶을 수 밖에. 이 시대 우리에게 리셋은 너무 쉽지 않은가. 그냥 매끈한 화면 위에서 엄지 한번 톡 갖다 대면 되니까. 그러고 싶었다.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냥 매끈한 화면 위에서 엄지 한번 톡 갖다 대면 되니까.
말할 데가 없었다. 말 많기로 유명한 내가. 시끄럽기로는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내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 겪어보는 기분이었다. 교환학생으로 핀란드에 있었을 때, 억지로. 진짜 아무도 없어서. 아니 그래도 그땐 카카오톡으로라도 말할 사람은 있었을 거다. 근데 이번엔 진짜. 누구에게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었다. 근데 뭐 사실 인생이 그렇지 뭐. 막상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할 사람은 없다. 울면서 전화를 해도, 괜히 카톡으로 '자니'를 보내도, 그럴 때는 그래도 그럭저럭 적당히 말 할 만 하기 때문에 말을 하는거다. 근데 이번엔 진짜 말할 데가 없었다. 함께 한치 앞만 보며 어두운 길을 달려가는 동료들에게도, 10년 넘은 친구에게도, 한 지붕 아래 함께 살아가는 가족에게도.
그렇게 어찌 저찌 잘 지내 보냈다. 시간은 언제나 흐르기 마련이니까. 아무리 힘들다고 생각해도 결국 지나가지 않나. 어린 시절 아무도 없는 집에서 매일 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기다렸을 때도, 입을 열기만 하면 눈물이 쏟아지던 아빠의 죽음 이후에도, 시간은 지나갔다. 이 정도는 사실 그 전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지. 지나갈 걸 알았다. 어떻게든 해결될 걸 알았다. 이 정도의 일은 지금의 내가 잊어버려 생각나지 않는 것 처럼 조만간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 수준의 위기 일 뿐이니까. 지나갔다. 다행히도.
상처 가득한 제주는 나를 받아줬다.
그제서야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이야기하고나니 술술 잘 풀렸다. 진작 이야기할걸. 별것도 아닌 것을. 동료들에게, 친구에게, 가족에게 이야기하고나니 다들 순순히 나를 놔줬다. 그래서 지금 제주다. 제주가 없었으면 어쩔뻔 했나. 상처 가득한 제주는 종이에 벤 수준의, 상처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상처를 갖고 비행기에 몸을 실은 나를 받아줬다. 바람은 좀 많이 불지만 말이다.
하는 일은. 없다. 뭘 하려고 온건 아니니까. 아니 근데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리어에 책을 좀 너무 많이 넣긴 했다. 수하물 15kg인데, 16kg 된걸 직원이 봐줬다. 심지어 진짜 캐리어에 책은 두권밖에 없었다. 열권은 백팩에 넣어 왔다. 근데 중요한거? 그 중에 한권도 제대로 안 읽었다. 여태. 읽겠지. 아직 한 열흘 시간 남았으니까.
나도 오그라든다. 미안하기도 하고.
정작 읽은 책은 이승우 작가의 '사랑이 한 일'이다. 사실은 꽤 오래전에 읽은 '사랑의 생애'를 다시 읽어보고 싶었는데, 숙소 주인님이 하시는 책방이자 숙소의 아래 층에 있는 서점에 하필이면 딱 그 책이 없었지 모람. 그래서 같은 작가의 신간을 샀고, 어찌저찌 잘 읽었다. 제목을 보고 눈치 챘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오그라 들지 않나. 하필이면 사랑이 제목에 든 책을 골랐다는 게. 나도 오그라든다. 미안하기도 하고. 여러모로. 여러 사람들에게.
암튼 도망온 대표는 이제 정신 차려야하지 않나 싶다. 2022년 글 쓰다보니 이제 3시간 앞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누군가는 소꼽장난이라고 손가락질 할 만한 회사일지도 몰라도. 우리 여기에 꽤 많은 기대와 노력과 희생을 녹아 넣지 않았나. 잘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꽤 비장했으니까.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누군가는 이 글을 읽을거고. 그럼 난 창피를 당할거고. 다음날 이불킥을 하며 급하게 지울지도 모르지만. 올리기로 결심한 만큼. 누군가에겐 나를 홀딱 베껴 드러내 보이기로 한 만큼. 책임을 지자. 물러서지 말자. 와인 남은거 다 잘 마시고, 혼자서 조용히 떠오르는 새해를 잘 마주하고. 정신 차리자. 잘하자. 잘 할 수 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