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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Jun 08. 2019

축구의 오심에 대한 정치철학 에세이

축구의 오심은 악, Var은 선일까?

축구의 오심이라는 현실과 지젝의 라캉이 말하는 실재- 정치철학 에세이2  20190131

                                                         -홍대동 반백수 조커조악 LSH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아시안컵 16강전이 얼마전 벌어졌다. 바레인을 상대로 1-0 한골차로 이기는 가운데 바레인 공격수가 한국 최종 수비수보다 앞쪽에서 패스를 받는 반칙, 즉 오프사이드로 골을 만들어냈다. 한국은 황당했지만 심판은 반칙을 선언하지 않았고, 경기는 1-1 연장전에서 극적인 결승골로 한국은 겨우 8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손흥민을 비롯해 체력이 고갈된 한국팀은 8강에서 카타르에게 무기력하게 지고 말았다. var, 비디오 판독은 대회 8강부터 적용이 가능했기에 벤투 한국감독은 추후 항의를 통해 정당성만 입증받을 뿐이었다.


 물론 한국축구팀의 패배는 체력뿐만이 아니라 상대팀의 전력, 선수의 부상, 동기부여 부족, 다양한 전술의 부재 등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된 결과물이다. 그렇지만 아시안컵 대회 주최측에서도 인정했듯이 명백하게 실재적으론 오프사이드 반칙인데도 심판이 판정한 현실에서는 반칙이 아니란 것은 경기를 바꿔놓은 큰 변수였다. 이렇게 실재the Real와 현reality이 갈라지는 듯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에선 동유럽의 기적이라 불리는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지젝은 헤겔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라캉주의 좌파 철학자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 같은 거창한 타이틀로 불리기도 하고 “MTV 철학자”같이 한때의 지적 유행, 좌파 상업주의에 불과하다고 폄하되기도 한다. 헤겔이나 라캉에 대해서 이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여기에서는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를 비롯한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등 지젝에 대한 입문서의 언어들을 빌려서 RSI 지젝의 철학 개념과 주장에 대해 축구의 오심과 관련하여 간략하고 흥미롭게 소개해보고자 한다. 흥미를 돋구는 차원에서 도발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왜 적지 않은 축구선수와 감독들이 비디오 판독의 도입을 거부하거나 늦추려고 할까? 심판의 실수나 주관성 등으로 인한 오심이 줄어들면 스포츠라는 승부의 세계가 더 진보하는 것 아닌가? 설마 그들은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는 구닥다리식 세계의 수호자들인 걸까?


 이를 위해 먼저 지젝이 따르는 라캉의 RSI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RSI는 세 가지의 약자로 the Real-실재(계) the Symbolic-상징계 the Imaginary-상상계로 흔히 번역된다. 라캉은 인간이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 이 RSI삼항조로 설명하려 한다. 상상계는 유니콘 황금산같이 현실엔 없을 수도 있는 언어 이전의, 이미지들의 세계이며, 상징계는 계약, 의무같이 언어를 통해 구조화된 대타자(신,아버지 등)the Other가 관장하는 질서, 현실의 세계다. 마지막으로 실재(계)는 언어라는 질서의 그물에 잡히지 않는 틈새, 상징화에 저항하는 구멍이라고 볼 수 있다. 지젝이 말하는 체스 게임의 예로 좀 더 살펴보자.


 


체스를 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규칙은 체스의 상징적 차원이다. 순전히 형식적인 관점에서 ‘기사’는 이것을 둠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변동 안에서만 정의된다. 이 상징적 차원은 상상적 차원과 명확히 대비된다. 상상적 차원에서 각각의 말들은 특유의 형태를 가지고 서로 다른 이름(왕, 왕비, 기사)으로 개별화된다. 그래서 규칙은 같지만 서로 다른 상상계, 즉 ‘메신저’ ‘러너’ 따위의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실재(계)는 게임의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연속적인 환경의 전체집합이다. 경기자의 지능이나 경기자를 당황하게 하고 갑자기 게임을 중단시키는 예기치 못한 침범 같은 것이다. -지젝의 how to read 라캉 18-19p


 


 축구를 예시로 들어본다면, 축구는 각 팀의 골키퍼를 제외한 선수는 손으로 공을 만지면 반칙이고 발로 골넣는 스포츠란 것이 상징계, 축구의 질서이자 현실이다. 그리고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라는 각자의 포지션과 명칭이, 이미지들의 상상계가 존재하지만 수비수가 최전방으로 전진해서 공격수처럼 활약하거나 -아시안컵 8강전에서 실제로 수비수 김민재가 마지막 10분 동안 최전방에서 계속 헤딩볼을 경합했다- 또는 공격수가 False nine -가짜 9번 역할로 골을 넣는 게 아니라 다른 선수가 골을 넣도록 수비수를 혼란시키는- 지루, 메시같은 공격수가 존재한다. 골 넣는 수비수나, 골이 주 목적이 아닌 가짜 공격수라는 이런 상상계는 이것이 계속 공유되고 새로운 규칙으로 수용된다면 새로운 질서, 상징계로 등록되는 것도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경기중에 고양이, 관중이 난입한다던가, 심판의 착오로 명백한 골을 노골 선언하는 사건 등이 실재(계)이며 이것은 기존의 상징계, 대타자의 질서에 구멍을 내는 송곳이며 그 구멍 자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여기는 Jouissance 향유, 향락으로 번역되는, 쾌락원리를 초과하여 죽음이라는 고통에 다가가는 쾌락의 장소다. 비디오 판독을 거부하는 축구선수는 바로 이러한 질서를 벗어나는 의외의, 쾌락을 초과하는 향락이라는 욕망(실재의 열정)을 축구에서 없애지 말자고 하는게 아닐까. 그것은 게임을 한순간에 무효화하면서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던 경기자들을 허탈하게 만든다.(하지만 동시에 해방시킨다!- 라고 로쟈 이현우는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21세기의 시작을 돌이켜 보면 미국의 911 쌍둥이 빌딩 파괴라는 사건, 스펙터클은 자본주의적 상상계에 구멍을 낸 실재의 침입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뒤엎어진 판을 다시 정돈하며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현재의 게임을 계속해야 하는지, 현재의 사회적 좌표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자문하게 하는 사건이라고 로쟈는 말한다. 한국의 경우에도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특히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는 국가라는 상상, 시스템에 구멍이 났고 현재 우리들의 삶은 이대로 과연 지속가능한지 묻게 될 수밖에 없는 사건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러한 질문과 대면하는 일은 두렵다. 그래서 부정하거나 회피한다. 그럴 때 우리가 주로 동원하는 것이 ‘환상’이다. 미국이 공격받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대테러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믿음, 한국에서 동성애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것이고 국가를 혼란시키는 것은 북한에서 온 빨갱이가 활동하는 것이기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동성애자들과 싸울 뿐만 아니라 ‘치료’해야 한다는 일부 극우 기독계의 믿음이 그러한 환상의 대표적 사례다...  영화 매트릭스 1편을 예로 들자면, ‘빨간 약’(현실) 대신에 ‘파란 약’(환상)을 선택하는 것이다.


 축구판에서도 이렇게 현실 대신에 환상을 동원해서 부정하거나 회피하는 일은 널려있다. 한때 한국팀이 중국팀에게 0-3으로 최초로 대패했을 때, 손흥민같은 1군 베스트일레븐 선수가 다 안모여서 졌을 뿐이라던가 심판이 원래 할머니가 중국 혈통이라던가 중국에게 매수된 게 틀림없다는 등 막장 판타지 소설스러운 루머를 퍼트려서라도 실재를 부정하고 싶었던 게 나를 포함한 대다수 한국 축구팬들, 풋볼클럽 대한민국 서포터들, 대중들의 정서였다는 건 부정하기 힘든 현실이었다. 이에 대해선 또 다른 글에서 다뤄야 하겠다. 그리고 이때 환상은 이데올로기라는 문제의식과 떼어내서 생각하기 어렵다. 지젝 또한 이 지점을 파고 든다.


 이데올로기는 주로 "이념‘ 또는 ‘허위 의식’이라고 번역되면서 단지 가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21세기 탈이념의 시대엔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하다고 쉽게 폄하되어 왔다. 문제는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 또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반지성주의라는 의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또한 알튀세르가 익히 말해온 대로 이데올로기는 단지 관념이 아니라 물질성을 갖기에 가족 학교 스포츠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에 의해 끝없이 의례로서 반복되고 실천되기에 끝없이 귀환하는 것이다. 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의 주된 근거는 스피노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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