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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Jun 20.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2-초인? 슈퍼맨? 위버멘쉬!

위버맨쉬=초인=슈퍼맨?인문학 두쪽내며 두쪽읽기

니체 전집 한국 번역판에서 다수 필사 메모함.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머리말 3 4


3.숲 가장자리에 있는 첫 도시에 들어선 차라투스트라는 그곳 시장터에 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줄타는 광대가 곡예를 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Ubermensh*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것들은 자신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 거대한 밀물을 맞이하여 썰물이 되기를 원하며 사람을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려 하는가? 사람에게 있어 원숭이는 무엇인가?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 아닌가. 위버멘쉬에게는 사람이 그렇다.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다.

너희는 벌레에서 사람에 이르는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너희는 아직도 많은 점에서 벌레다. 너희는 한때 원숭이였다. 그리고 사람은 여전히 그 어떤 원숭이보다도 원숭이다운 원숭이다.

너희 가운데 더없이 지혜로운 자라 할지라도 역시 식물과 유령의 분열이자 튀기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나 너희에게 유령이나 식물이 되라고 분부하고 있는 것인가?

보라,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다. 너희 의지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라.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 되어야 한다고!

형제들이여, 간청하노니 대지에 충실하라.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그런 자들은 스스로가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독을 타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생명을 경멸하는 자들이요, 소멸하가고 있는 자들이자 독에 중독된 자들인바 이 대지는 그런 자들에 지쳐 있다. 그러니 저들이 저 하늘나라로 떠나만 준다면!

지난날에는 신에 대한 불경이 가장 큰 불경이었다. 그러나 신은 죽었고 그와 더불어 이들 불경을 저지른 자들도 죽어 없다. 이 대지에 불경을 저지르고 저 알 길 없는 것의 오장육부를 이 대지의 뜻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것. 이제는 그것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지난날에는 영혼이 신체를 경멸하여 깔보았다. 그때만 해도 그경멸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었다. 영혼은 신체가 야위고 몰골이 말이 아닌데다 허기져 있기를 바랐다. 그럼으로써 그는 신체와 이 대지에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 이 영혼 자체가 야위고, 몰골이 말이 아닌데다 허기져 있었으니, 그리고 잔혹함이 이들 영혼이 누린 쾌락이었으니!





4.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을 바라보고는 의아해했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도 위험하고,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며, 벌벌 떨고 있는 것도 멈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사람에게 있어 위대한 것은 그가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사랑받을 만한 것은 그가 하나의 오르막이요 내리막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위대한 경멸자들을 사랑하노라. 왜냐하면 그런 자들이야말로 위대한 숭배자요 저기 다른 편의 물가를 향한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왜 몰락해야 하며 제물이 되어야 하는지. 그 까닭을 먼저 별들 뒤편에서 찾는 대신 언젠가 이 대지가 위버멘쉬의 것이 되도록 이 대지에 헌신하는 자를.

나는 사랑하노라. 깨닫기 위해 살아가는 자, 언젠가 위버멘쉬를 출현시키기 위해 깨달음에 이르려는 자를, 그런 자는 그럼으로써 그 자신의 몰락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니.

나는 사랑하노라. 위버멘쉬가 머무를 집을 짓고 그를 위해 대지와 짐승과 초목을 마련할 생각에서 수고하고 궁리하는 자를, 그런 자야말로 그럼으로써 그 자신의 몰락을 바라고 있기에

...

나는 사랑하노라. 사람들 위에 걸쳐 있는 먹구름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과 같은 자 모두를.   그런 자들은 번갯불이 닥칠 것임을 알리며 그것을 예고하는 자로서 파멸해가고 있으니.

보라. 나는 번갯불이 내려칠 것임을 예고하는 자요, 구름에서 떨어지는 무거운 물방울이다. 번갯불, 이름하여 위버멘쉬렸다.





/


*위버멘쉬Ubermensh- 니체 전집에 실려있는 각주에 따르면, 반역사적 퇴행의 길을 가고 있는 오늘날의 인간에게 인류의 미래를 맡길수 없다는 판단에서 니체가 제시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다. 플라톤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서양 근대 사회는 인간을 생과 신체에 대해 적대적으로 대하도록 가르쳤다. 이같은 초월적 이상의 그늘 속에서 인간은 자기 부인과 비하를 온몸으로 익혀 왜소하고 구차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작 생존에나 집착하고 있는 오늘날의 대중적 인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간이 출현하여 그릇된 과거를 청산하고 건강한 미래를 열어야 한다. 니체는 머릿속에 그와 같은 인간을 그렸고, 그를 가리켜 위버멘쉬라 했다.


위버멘쉬는 어디까지나 이 땅에서 구현, 달성되어야할 현세적 이상이자 목표다. 결코 초월적 신격이나 인격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일본의 예를 따라 그것을 초인 으로 옮겨왔다. 그럴 경우 위버멘쉬는 니체의 의도와는 반대로 초월적 인격으로 잘못 해석될 지가 있다. 참고로, 위버멘쉬는 어떤 특정한 인간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이 땅에서, 그것도 자력으로 달성해야 할 개인적 이상이자 목표다. 니체는 지금까지는 위버멘쉬가 존재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는 무수히 많은 위버멘쉬가 출현해야 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바람직한 것은 모든 인간이 위버멘쉬가 되어 자기 존재를 극복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과거 대부분의 니체 독자는 이 머리말의 니체 안에서 철학적 핵심 개념이라고 봐도 무방한 위버멘쉬 부분에서부터 오독을 해왔다. 니체 전집의 역자분이 초인이라는  잘못된 이전 번역탓을 하는 것도 일리는 있다. 영어 번역에서도 니체의 위버멘쉬를 superman으로, 따따다 땅따땅 하는 듣기만 해도 하늘을 날아야  것 같은 너무나 유명한 배경음악의 그 슈퍼히어로를 떠올리는 번역을 해오다가, 요즘은 한국 전집 번역처럼 슈퍼맨이 아니라 위버멘쉬 원어 자체로 옮긴다고 한다. 작년에 한국 문화사 수업을 시민대학에서 듣는데 안타깝게도 그 문학박사 선생님도 니체에 대해 질문이 나오자  니체의 위버멘쉬를 초인이라고 설명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박사 학위자일 지라도 누구나 자기 전공이 아니면 잘 모를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넘어갔지만, 어쩌면 복잡한 철학적 개념을 맥락을 빼버리고 최대한 대중적으로 쉽게 설명하려다 보면 누구나 쉽게 범하는 오류가 아닐까 싶다. 론, 그럼에도 본문을 읽으면 느낄 수 있듯이 니체가 대중을 멀리하고 엘리트주의적 성향이 있음은 그 누구도 부정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또 니체에 근거에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현 시대의 민주주의는 최선, 최고의 정치체제인가?그렇지 않다면 지금의 대의 민주제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결국 사람들 개개인이 스스로 자기 한계를 극복하려는 투쟁과 공부가, 자신 이상의 것을 창조하려는 존재 위버멘쉬에 다가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럴려면 니체가 말하듯 스스로 몰락이, 자신의 욕망이라 착각하거나 자신의 것이라 생각했던 환상을 내려놓는게 필요할 것이다. 니체는 바로 그런 몰락하는 자들을 사랑한다.



 먼나라 이웃나라로 너무나 유명한 이원복 선생님도 철학사를 쉽게 설명하려는 만화에서, 니체의 위버멘쉬 개념을 설명하실 때 니체가 슈퍼맨 쫄쫄이 의상을 입고 힘을 자랑한다는  식으로 묘사하신 적이 있다. 적어도 이제부터라도 니체의 위버멘쉬는 초월적 인격신 같은 존재가 아닌, 스스로를 극복하는 존재라는 극복인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면 이후에도 니체의 논의를 따라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뭐 물론 자기만의 해석을 중시하면서 니체는 초인이 되고 싶어했고 자신이 바로 각종 인간만도 못한 벌레보다 우월한 초인이다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20세기에 그런 사람들이 가방안에 차라투스트라를 넣고 다니면서 총을 들고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 놓었다는 흉흉한 낭설도 돌아다닌다. 집단적 인종적 우월주의를 표방한 그들의 이름은 다들 알다시피 "나치"였다. 그리고 지금 21세기에그들의 정신적 후예들은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 온갖 혐오로 다른 존재들을 멸시하고 비방하며 스스로를 더 우월한 존재라고 여기며 셀프 낙인을 찍는다. 심지어 니체가 처음부터 일관되게 비판한 하늘나라의 설교, 즉 기독교의 교리와 니체의 위버멘쉬 철학을 섞어버리기도 한다. 정치적이거나 철학적 성향이 문제가 아니라, 그저 멍청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굉장히 무섭다는 이경규옹의 짤방 한마디가 생각날 지경이다. 이 정도로만 말을 줄여야 하겠다. 그럼에도 해석은 각자 마음의 자유 아니겠는가? 다음 글에서는 이렇게 스스로 멍청한 행복을 원하는 말세인. 최후의 인간에 대해서 다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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