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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Jun 19.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1-차라투스트라 머리말1 2

두쪽을 두쪽내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던가?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니체 전집 한국 번역에서  인용함.


1.

차라투스트라는 나이 서른이 되던 해에 자신의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갔다. 산 속에서 자신의 정신과 고독을 즐기면서 보내기를 십년, 그런데도 그는 지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그의 마음에 변화가 왔다. 그리하여 어느 날 아침 동이 트자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태양을 향해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너 위대한 천체여! 네가 비추어주고 있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너의 행복이겠느냐!

너는 지난 십 년 동안 여기 내 동굴을 찾아 올라와주었다. 내가 나의 독수리와 뱀이 없었더라면 너 너의 빛과 그 빛의 여정에 지쳐 있었으리라.

우리는 아침마다 너를 기다렸고, 너의 그 차고 넘치는 풍요를 받아들이고는 그에 감사하여 너를 축복해왔다.

보라! 나는 너무 많은 꿀을 모은 꿀벌이 그러하듯이 나의 지혜에 싫증이 나 있다. 이제는 그 지혜를 갈구하여 내민 손들이 있어야겠다.

나는 베풀어주고 싶고 나누어주고 싶다. 사물들 가운데서 지혜롭다는 자들이 새삼스레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가난한 자들이 새삼스레 자신들의 부유함을 기뻐할 때까지.

그러기 위해 나 저 아래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내가 저녁마다 바다 저편으로 떨어져 하계에 빛을 가져다줄 때 그리하듯, 너 넘치도록 부유한 천체여!

나 이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저 아래로 내려가려 하거니와, 나 저들이 하는 말대로 너처럼 내리막길-몰락을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없이 큰 행복조차도 시샘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너, 조용한 눈동자여, 그러니 나를 축복하라!

바야흐로 넘쳐흐르려는 이 잔을 축복하라. 이 잔으로부터 물이 황금빛으로 흘러넘치도록, 그리하여 온 누리에 너의 환희를 되비추어주도록!

보라! 잔은 다시 비워지자 하고,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사람이 되고자 하니.“

이렇게 하여 차라투스트라의 내리막길-몰락은 시작되었다.


2.

차라투스트라는 혼자서 산을 내려왔다. 그 누구도 그와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나 숲속에 들어서자 노인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숲속에서 풀뿌리를 캐기위해 자신의 신성한 오두막집을 떠난 자였다. 노인이 차라투스트라에게 말했다.

“이 나그네, 낯설지가 않구나, 여러해 전에 이곳을 지나간 일이 있지. 차라투스트라라고 했지. 그러나 그도 변했구나.

그때 그대는 그대의 재를 산으로 날랐었지. 그대 오늘은 그대의 불덩이를 골짜기 아래로 나르려는가? 불을 지르고 다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벌이 무섭지도 않은가?

그렇다. 틀림없이 차라투스트라야. 눈은 맑고 입에는 역겨움이 서려 있지 않으니, 그리하여 춤추는 자처럼 걷고 있지 않는가?

차라투스트라가 변했구나. 차라투스트라가 어린아이가 되었구나. 차라투스트라는 잠에서 깨어난 자다. 이제 그대는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지?

바다 속에서 그리하듯 그대는 고독 속에서 살았고 그런 그대는 바다가 떠받쳐주었지. 저런, 이제 뭍에 오르려는가? 저런, 또다시 그대 자신의 몸을 질질 끌고 다니려는가?“

차라투스트라는 대답했다. “나 사람들을 사랑하노라.”

그러자 성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숲속으로 그리고 광야로 갔던 것이지? 사람들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나는 이제 신을 사랑하노라. 사람은 사랑하지 않노라. 내게 사람은 너무나도 불완전한 존재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나를 죽음으로 내몰고 말리라.“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내가 사랑에 대해 무슨 말을 했던 것이지! 나 사람들에게 선물을 가져가고 있거늘.”

성자가 말했다. “저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말라. 차라리 저들에게서 얼마를 빼앗아 그것을 저들과 나누어 짊어지도록 하라. 저들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더없이 기분 좋은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대에게도 기분 좋은 일이 된다면야!

그리고 저들에게 뭔가를 줄 생각이라면 적선 말고는 따로 줄 것이 없다. 그리고 저들로 하여금 그것을 위해 구걸케 하라!“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아니지, 나 적선 따위는 하지 않지. 나 그정도로 구차한 것도 아니고.”

성자는 빈정대듯 웃고는 이렇게 말했다. “눈여겨 살펴보시라. 저들이 그대의 보물을 받아들일지를! 저들은 은자들을 미심쩍어하지. 우리가 무엇인가를 주기 위해 온다고 믿지를 않지.

골목길을 지나가는 우리의 발걸음은 저들에게 너무나도 쓸쓸하게 울린다. 그리하여 동이 트려면 아직도 먼 한밤중에 잠자리에 누워 지나가는 사람의 발소리를 들으면서 그리하듯 저들은 물을 것이다. ‘도둑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하고.

그러니 사람들에게 가지 말고 숲속에 머물도록 하라! 차라리 짐승들에게나 갈 노릇이다! 그대는 왜 나처럼 곰 한가운데 한 마리의 곰이 되려고 하지 않으며 새 가운데 한 마리의 새가 되려고 하지 않는가?“

“그러면 성자께서 숲속에서 하는 일은 무엇이지?” 차라투스트라가 물었다.

성자가 대답했다. “노래를 짓고 노래를 부르지. 그리고 노래를 지으면서 웃고 울며 중얼거리지. 나 이렇게 신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지. 노래하고 울고 웃고 중얼거림으로써 나 나의 신은 그 신을 찬양하고 있다는 말일세. 그건 그렇고 그대는 우리에게 무엇을 선물로 가져 왔는가?“

이 말을 듣자 차라투스트라는 성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는 말했다. “그대에게 줄 무엇이 내게 있겠는가! 나로 하여금 서둘러 가던 길을 가도록 하게나. 내가 그대에게서 그 어떤 것도 뺴앗는 일이 없도록!” 이렇게 하여 그들은, 성자와 사내는 마치 두 사내아이가 웃듯 웃으면서 헤어졌다.

홀로 남게 되자 차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 늙은 성자는 자신의 숲속에 파묻혀 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아직 듣지 못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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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를 하면서 타인의 글과 정신을 마음에 남기고 몸에 새기고 싶다면 메모 또는 베껴쓰기선택이 아니라 필수 아닐까. 여름이라 몸이 허해졌는지  다시 니체를 읽어보고 싶은 시간이 찾아왔다. 허나 단지 지금보다도 어리고 어리숙할 시절처럼 니체의 마성어린 문장들에 끌려가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두쪽읽기를 시작해본다. 좋은 글일수록 고전일수록 하루에 결코 많은 페이지를 읽을 필요는 없다. 단지 페이지만 넘기고 나서 아무 의미도 남기지 못한 채 야 나는 니들 안읽는 고전 읽었거든 하면서 지적 허영만 남기던 과거는 이제 질리는 것이다. 단 두 쪽만 읽을지라도, 마치 타인의 머릿속을 두쪽 내듯이 깊숙히 읽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안티 크리스트 같은 노골적인 니체의 다른 글 제목까지 가져오지 않아도, 니체가 기독교에 대해 굉장한 거리감과 적대감을 품고 있다는 것은 니체의 아무 책이나 한 권만 읽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가 아닌 조로아스터교에서 따온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로 이 장대한 철학 소설은 시작한다. 머리말 1에서 그는 높은 곳에서 내려왔으며, 이제 다시 사람이 되고자-몰락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바로 다음 글에 다루겠지만, 위버멘쉬-초인 또는 극복인으로 번역되는 이 개념은 이미 글의 첫 시작에서부터 신이나 구세주 같은 초월적 존재와는 다르다는 것을 암시한다. 신에서 인간으로 몰락하는게 가능하다면 그는 이미 종교적인 초월적 존재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는 마치 니체가 자주 찬양는 그리스적인 문화와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인간도 신이 될 수 있고 신도 인간이 될 수 있는, 기독교적인 신과 인간의 이분법 자체가 없는 세계가 기본적인 니체의 세계관인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반론이 존재한다. 박홍규 선생님이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 같은 책에서 거론하다시피 니체는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엘리트주의자가 아니었는가? 지금같이 민주주의가 마치 당연한 보편적 정의처럼 여겨지는 21세기에 정치 철힉자로서 니체는 옹호될 수 있을까??


 하지만 '가장 나쁜 독자는 약탈하는 군인과 같다. 그들은 타인의 것 중에서 자기가 갖고 싶은 것만 취하며, 나머지는 부수고 망가뜨린다'라고 니체는 또 다른 책에서 말한 바 있다. 아마 니체-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이라는 해설서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또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 1부나 즐거운 학문 책에서 짐짓 무거운 체하는 성자나 학자들을 비웃으며, 삶이란 배움이란 가벼워지는 것이고 춤을 추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런 부분들이 니체를 읽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임에 있어서 혼란스럽고 모순적으로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 이 연재글도 그러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것이 니체의 매력이고, 마치 영화  다크나이트의 조커처럼 혼돈을 자기 안에 품을 수 있는지 니체가 독자에게 대놓고 묻는 대목이다. 그러면 이제 하루에 두 쪽씩 노예처럼 폭군처럼 한번 니체에 순종하기도 하고, 두쪽을 내며 반기를 들어보기 하자. 제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도 도서관에서 서점에서, 또는 집의 낡은 책장에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하루에 두세 페이지씩 천천히 같이 읽어보기를 추천드린다. 때론 더없이 총체적으로 진지하게, 종종 어린아이처럼 신이 죽었다고 노래하면서 기쁨의 댄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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